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3등칸의 미래와 변신
지난번에 못다 한 ‘답’부터 얘기하자. 시베리아 횡단열차 3등칸이 몇 년 후 사라지게 될 거라는 소식에 부랴부랴 러시아로 떠난 나는 이르쿠츠크에서 예카테린부르크로 가는 기차 3등칸에서 우리 객차를 담당하는 승무원에게 내내 궁금해 하던 질문을 마침내 던졌다. “플라츠카르트(3등칸)가 사라지다니요! 그러면 러시아 승객들은 다 어디로 갑니까?” 그녀의 대답이다. 말인즉, ‘현대화’ 작업에 따라 3등칸 객차를 개조하는 것은 맞지만 플라츠카르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모습이 바뀔 뿐이라며 승무원이 내게 되묻는다. “중국 기차 타 보셨나요? 3층으로 된 침대칸이요. 그런 식으로 바뀌게 될 거예요.” 중국 기차를 타 본 적이 없어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여러 종류 중 딱딱한 침대(잉워,硬?)가 두 개씩 3단으로 배열되어 6인1실을 이루면서 개방형 구조로 된 침대칸이 있다. 승무원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리라.
그런데 러시아 기차의 3등칸이 과연 그렇게 바뀔지는 알 수 없다. 앞으로 어떻게 변모해 갈지―아마 플라츠카르트의 일부는 그녀의 말처럼 중국식을 따르게 될지도―모르지만, 근래에 소개된 새로운 플라츠카르트의 모습은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2018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러시아의 교통’ 전시에는 이른바 ‘현대화’된 3등 객차가 첫선을 보였다. 이후 12월 10일부터 두 달 간 모스크바의 카잔역 대합실에서 이 객차를 전시해 러시아 승객들의 의견을 취합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9년 3월 새로운 플라츠카르트가 모스크바 카잔역과 로스토프 구간에서 처음으로 운행되었다.
이 개조된 열차를 소개하는 동영상도 유튜브에 올라왔는데, 그 밑에 달린 댓글들은 거의 다 부정적이다. 좌석마다 전원 콘센트와 유에스비(USB) 단자가 생겼다는 것(1층은 둘 다, 2층은 유에스비만 있다)이 유일하게 좋은 점이라는 게 공통된 의견이다. 그밖에는, 짐을 놓는 곳이 좁아졌다(게다가 전과는 달리, 1층 침대 밑에 짐을 두면 덮는 게 없어 다 보인다), 2층에 만들어진 컵을 놓는 탁자는 뜨거운 차를 아래로 쏟을 수 있어 위험할 뿐이다, 2층의 수건걸이가 사라졌다, 자리마다 커튼을 치기 위해 그 많은 돈을 썼느냐 등등, 러시아 언론에서 승객들이 만족하고 있다고 보도한 것과는 달리, 불만어린 반응들이 댓글의 주를 이루고 있다.
새로 만들어진 3등칸의 모습에 대한 각자의 소감은 다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개인적 공간’을 위해 각 좌석에 설치될 커튼이 낯선 이들 사이에서 스스럼없이 이뤄지던 나눔과 대화의 장을 축소 내지 차단하게 되리라는 점이다. 그것이 3등칸의 최대 매력이자 정체성이었다고 한다면, 그런 의미에서 예전의 플라츠카르트는 사라진다고 볼 수도 있겠다. 사실, 시간이 흘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기차 안의 분위기는 내가 처음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던 1990년대 초에 비해 이미 많이 바뀌었다. 물리적인 변화도 발견했다. 중간 중간 내리면서 이동하는 동안, 내가 탄 기차가 ‘현대화’된 2019년 모델은 아니지만, 열차를 바꿔 탈 때마다 전원을 꽂는 곳이 많아진 것이다! 하바롭스크~슬류쟌카 이동 시 3등칸에는 전원 콘센트가 객차의 앞뒤에만 있었고, 이르쿠츠크~예카테린부르크 3등 객차에는 앞뒤와 중간에 있었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갈 때 탔던 열차의 3등칸은 1층 자리마다 전원을 꽂을 수 있었고 2층 침대 머리맡에는 유에스비(USB)를 꽂게 되어 있었다! 물론 인터넷은 거의 터지지 않았지만. 묘한 일이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아시아에 위치한 극동 러시아에서 유럽에 가까운 수도 모스크바의 러시아로 갈수록 전원 콘센트가 많아졌으니 말이다.
현재의 3등칸(플라츠카르트) 모습. 2층 침대 위에 있는큰 선반에 이불과 2층 승객의 짐을 놓을 수 있다. 사진/필자 제공
기차역에서 마주한 철도의 역사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의 짐 보관소에 배낭을 맡기고 나왔을 때는 아직 어둑어둑한 새벽 5시, 큰길을 가로 질러 기차역 맞은편에 서 있는 불빛 속 레닌 동상만 보고 다시 역 안으로 들어왔다. 소련 붕괴 당시 레닌 동상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면 의아할 수도 있지만, 블라디보스토크처럼 몇몇 다른 도시들에서도 이 혁명지도자의 동상은 여전히 건재하다.
날이 밝아올 때까지 둘러본 역사(驛舍) 안 전시관은 극동 지역의 철도 건설과 발전 과정을 보여준다. 역사 밖 플랫폼에는 블라디보스토크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종착지임을 알리는 도정표(道程標) ‘9288’(km) 비석이 세워져 있고 오래된 증기기관차(Еа−3306)가 대조국전쟁(1941∼1945년 소련과 독일의 전쟁) 당시 분투한 철도노동자들을 기리며 전시되어 있다. 역사 안에는 1891년 이 건물의 초석을 놓은, 미래의 니콜라이 2세이자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가 될 황태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1868~1918)의 청동 부조가 눈에 띈다. 사실 이 부조는 2017년에 만들어진 것인데, 그 앞에 꽃이 놓여 있다. 이 기차역은 1893년 완공되어 그 첫 운행을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 구간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특히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오래 전 기차 안에서 사용되었던 등불, 20세기 말까지 기차표 판매원이 사용했던 수판, 역무원의 제복과 모자, 이 역사에서 근무했던 옛 역무원 혹은 승무원들의 사진 속 모습이다. 또한 그들 뒤에는 선로를 관리하고 수선하는 보선원들이 있고, 그보다도 전에, 힘겹게 철도를 건설했을 수많은 사람들이 숨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의 전시실은 승객과 함께 철도의 역사를 만들어 온 철도노동자들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기차역 전시실 안의 모습. '과거 사진첩, 블라디보스토크 철도역'이라고 쓰여 있다. 사진/필자 제공
시장의 아침
하바롭스크행 저녁 기차를 탈 때까지 반나절의 시간이 있으니 발길 가는대로 걷기로 한다. 토요일 아침이라 혁명광장 한 쪽에 야외시장이 열리고 있다. 혁명광장은 ‘1917~1922년 극동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위해 싸운 투사들에게’라는 기념비와 그들을 기리는 여러 조각상들이 있는 곳이지만, 우리에게는 1937년 스탈린이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기 위해 집합시켰던 비통한 장소로 유명하다. ‘…투사들에게’ 기념비는 1961년에 세워졌으니 그보다 한참 후인 셈이다.
고려인들의 고향인 연해주답게, 각종 농산물, 유제품 속에서 김치가 눈에 띈다. 항구도시지만 생선 가격은 싼 것 같지 않다. 과일도 그다지 싸 보이지 않는다. 후에 기차 안에서 듣기도 하고 다른 도시에 가서 보고 느끼기도 한 것이지만, 극동의 물가가 결코 싸지 않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는 군사기지에 자유무역항이니 그런대로 활기차 보이지만, 하바롭스크는 일거리도 더 적고 침체되어 보이는데 대중교통은 조금 더 비싸다는 게 의아했다. 예를 들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일반버스 값이 23루블이었는데(도시마다 ‘마르슈루트’라 불리는 미니버스는 더 비싸다), 하바롭스크에서는 25루블 그리고 저녁 8시 이후에는 30루블이라고 차 안에 쓰여 있었다. 이르쿠츠크 일반버스비는 아마도 20루블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디든 비슷하겠지만, 러시아의 극동 지역에서 사는 것이 서쪽보다 쉽지는 않아 보인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야외시장에서 흑빵과 치즈를 사 뜯어 먹으며 문득 생각한다. 그 시절 기숙사 근처 지하철역에 매일 서던 야외시장은 어떻게 되었을까?
시장 모습. 김치 1킬로그램에 140루블이라 적혀 있다(원화는 루블 곱하기 20보다 약간 적음). 사진/필자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