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정해훈 기자] 회사 임원이 자금을 횡령한 후 배우자에게 생활비 등 목적으로 송금했더라도 이를 재산을 빼돌리기 위한 증여로 볼 수 있으므로 돈을 반환해야 한다는 대법원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이기택 대법관)는 다국적 기업 ABB의 한국법인 ABB코리아가 재무관리 담당 상무 오모씨의 부인 원모씨를 상대로 낸 사해행위 취소 소송에 관한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 합의부로 돌려보냈다고 2일 밝혔다.
오씨는 지난 2005년 3월14일부터 2017년 2월3일까지 AAB코리아의 자금 약 1318억원을 횡령하고, 2017년 2월4일 외국으로 도피했다. 오씨는 2008년 6월2일 AAB코리아 계좌에서 원씨 계좌로 3000만원을, 2017년 2월3일 자신의 계좌에서 원씨 계좌로 8만7000달러를 송금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AAB코리아는 8만7000달러를 송금한 것은 증여해 해당하고, 오씨가 고의로 재산을 감소해 빚을 갚기 어려운 상태로 만든 사해행위에 해당한다면서 해당 자금을 반환하란 소송을 제기했다. 또 3000만원에 대해서도 부당이득에 해당한다며 반환을 주장했다.
1심은 AAB코리아의 청구 일부를 인용해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우선 8만7000달러에 대해 변론종결일 환율 기준으로 원씨가 AAB코리아에 9683만원 상당을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이에 대해 "채무자가 채무초과 상태에서 자신의 재산을 타인에게 증여했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러한 행위는 사해행위가 되므로 오씨가 피고에게 8만7000달러를 증여한 행위는 사해행위에 해당하고, 수익자인 피고의 악의도 추정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피고는 이 돈은 자녀들의 학비와 생활비 명목으로 받은 것이고, 이것이 사해행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므로 선의의 수익자라고 주장한다"며 "그러나 피고가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피고를 선의의 수익자라고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설명했다.
또 "피고가 원고의 계좌로부터 이체받은 3000만원은 법률상 원인 없이 이뤄진 것이므로 피고는 원고에게 이를 반환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 전경. 사진/뉴스토마토
하지만 2심은 1심 판단과 달리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8만7000달러가 증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이에 대해 "피고는 말레이시아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인 2011년 12월부터 2017년 2월3일까지 피고 명의의 계좌를 개설해 주기적으로 오씨로부터 생활비와 교육비 총 91만1488달러를 송금받아 왔는데, 8만7000달러가 이와 같은 생활비와 교육비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점, 실제로 8만7000달러는 자녀들의 학비와 생활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의 사정에 비춰 원고가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원고의 주장 사실을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또 "오씨가 원고의 재무관리 담당 상무로 근무하면서 원고 명의 계좌에서 3000만원을 횡령해 피고 명의의 계좌로 이체했더라도 원고가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피고가 그와 같은 횡령 사실에 대해 악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으므로 원고의 주장은 이유 없다"고 3000만원도 부당이득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3000만원을 반환하지 않아도 된다는 원심 판단을 유지했지만, 8만7000달러는 증여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이에 대한 원심판결 부분을 파기했다.
재판부는 "오씨가 피고에게 8만7000달러를 송금한 것은 해외 도피가 임박한 시점에 원고의 자금을 빼돌려 무상으로 피고에게 종국적으로 귀속하기 위한 것이었고, 피고도 그와 같은 사정을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며 "피고가 8만7000달러를 자녀들의 학비와 생활비 등으로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사후적인 사정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 전경. 사진/뉴스토마토
정해훈 기자 ewigjung@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