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이세티 강을 막아 만든 예카테린부르크의 ‘도시 연못’(저수지)에서 쉬는 시민들. 사진/필자 제공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에서 유라시아를 생각하다
신유라시아주의를 사상적 토대로 삼은 푸틴의 정책은 옛 소련의 구성국들로 결성된 유라시아경제공동체(2000~2014년)와 유라시아경제연합(2015년~현재)의 탄생을 낳았다. 신유라시아주의는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등장해 1990년대에 이론적 발전을 이루고 2000년대에 대중적으로 확산됐는데, 그 특징으로 반(反)서구주의, 반자유주의, 반세계화 경향을 들 수 있다. 소련 붕괴 후 옐친 정권이 무방비 상태에서 단행한 시장경제로의 개혁은 90년대의 러시아 사회를 큰 혼란과 무질서 속에 빠뜨렸고 러시아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아시아와 유럽이 혼재되어 있지만 아시아도 유럽도 아닌 고유한 러시아 문화와 정신을 강조했던 유라시아주의는 이제, 서구(특히 미국) 중심의 세계화에 맞서, 유라시아 대륙의 다양한 민족들과 문화들을 새로운 공동체로 묶어내려는 신유라시아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 역할을 러시아가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러시아의 보수주의적 신유라시아주의자들이다. 물론 이들에게 정교는 빼놓을 수 없는 핵심이다. 1998년 80세 생일을 맞은 솔제니친이 옐친의 훈장을 거부하며 “러시아를 현재의 재앙 상태로 이끈 최고 권력으로부터 상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2007년 푸틴의 상은 받았고 그를 지지했던 이유도 그들 사이의 사상적 공감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숙소에서 만난 청년 세대
대조국전쟁(1941~1945) 당시 소련군 부상병을 위한 병원 제3864호가 이 건물에 있었다고 쓰여 있다. 사진/필자 제공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숙소인 호스텔을 나와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바로 그 건물에 대조국전쟁(1941~1945) 당시 소련군 부상병을 위한 병원 제3864호가 있었다는, 벽에 붙은 작은 안내판이었다. 순간 뭉클해졌다. 길을 걸으면서 얻게 되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곳곳의 건물들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한때 부상병들을 치료했던 뜻깊은 장소에서 나는 러시아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호스텔의 공용식당에서 만난 청년 야릭 씨는 장기 체류자다. 그는 페름 변강주의 쿤구르라는 작은 도시에서 예카테린부르크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왔는데 현재 웹 개발자로 일한다고 했다. 출근 전, 선한 인상의 이 청년은 미리 준비해 둔 삶은 메밀과 닭고기 몇 조각을 덜어 점심 도시락을 싸다가 내가 바라보니 싱긋 웃으며 말한다. “노동자 음식이에요.”
호스텔의 장기 체류자 야릭 씨가 출근 전 점심 도시락(오른쪽 위)을 싸고 있다. 갈색의 삶은 메밀이 90년대 초 모스크바대 기숙사 식당에서의 묵은 기억을 끌어냈다. 사진/필자 제공
1992년 모스크바 생활 초창기 기숙사 구내식당에서 필기체로 휘갈겨 쓴 메뉴판과 낯선 음식 이름 때문에 주문에 어려움을 겪던 시절, 고기 같은 것이 들어간 주 요리 없이 삶은 메밀만 2인분 시켜 먹는 러시아 학생들을 때때로 보곤 했다. 반면, 러시아 음식이 낯선 한국인 유학생들 중 주 요리를 여러 개 주문해 놓고 입맛에 안 맞아 그대로 남기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그 대비가 주는 불편함에 나는 늘 접시를 깨끗이 비우곤 했다. 나에게 쿤구르 얼음 동굴을 추천하고 캐러멜 모양의 달달한 후식도 권하던 친절한 우랄 청년이 급히 일터로 떠난다. 하바롭스크의 허름한 숙소에도 외지에서 일하러 온 이들이 있었다. 일거리를 찾아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모스크바로 간 따냐 씨(21화, 28화)의 말에 의하면, 타지에서 온 노동자들이 장기 체류하는 저렴한 호스텔이 모스크바에 있다고 한다.
다인실에서 만난 여행자 올랴 씨와 엘랴 씨는 자매다. 각각 1995년, 2000년생인 이들은 모스크바에서 공부하는데, 언니 올랴는 커뮤니케이션 전공 졸업자고 동생 엘랴는 물리학 전공을 다른 걸로 바꿀 예정이라 했다. 이들은 뜻밖에도 8분의1 고려인이다. 고려인인 외증조할머니가 러시아인과 결혼해 외할머니는 2분의1, 어머니는 4분의1 고려인이라고 설명한다. 외증조할머니는 스탈린 시절 하바롭스크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당했다. 그 이후 자매의 조부모, 부모 모두 우즈베키스탄에서 살았지만 90년대에 일가가 모두 상트페테르부르크(뻬쩨르)로 이사했다고 한다.
“90년대는 참 힘든 때였는데... 우즈베크처럼 먼 곳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뻬쩨르로 이주해 새로 정착하는 게 어려웠을 텐데요...” “우리는 대가족이어서 차례차례 이주했어요. 사는 건 거기도 힘들고 여기도 힘드니 무슨 차이가 있었겠어요? 하지만 최소한 가족이 함께 있으려 했고 그래서 일가의 구성원 모두가 뻬쩨르로 이주했습니다.”
할머니는 현재의 생활을 선호하고 할아버지는 우즈베키스탄을(소련이 아니라!) 그리워한다고 자매가 귀띔해 준다. 할아버지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우즈베크로 이주한 러시아인이다. 1993년 1월 사마르칸트에서 모스크바로 오는 기차 안에서 만났던 러시아인 가족도, 평생 살았던 우즈베키스탄에 대한 애정이 깊었지만, 민족주의가 강화되는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러시아로 이주하는 중이었다. “부모님도 현재를 선호해요. 삐오네르 스카프 같은 걸 원하시지 않거든요.” 자매가 웃으며 덧붙인다.
예카테린부르크 지하도에 있는 빅토르 초이의 추모벽 앞에는 그의 노래를 부르는 거리공연자와 젊은 관객들을 볼 수 있다. 사진/필자 제공
나는 올랴와 엘랴에게 러시아 청년 문화에 관해 묻기 시작했는데, 확실히, 90년대에 느꼈던 한국과 러시아 젊은이들 사이의 간극이 느껴지지 않는다. 안정된 자본주의 러시아의 청년 세대는 우리의 청년 세대와 별 다를 바 없다. 휴대폰으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초등 2학년부터 배우는 영어 실력은 ‘실습’ 덕분에 부모 세대보다 월등하다. 중국어도 제2외국어로 초등학교 때부터 배울 수 있다고 한다. 러시아 청년 세대에게도 역시 정보기술(IT) 분야가 인기다.
“아이티의 인기는 좋아해서라기보다 필요해서지요. 최근 5년 동안 그 변화를 확연히 느낄 수 있어요. 예전엔 인문학이 우세했고 언어 전공이 인기 있었어요. 90년대엔 물건을 팔아 돈을 벌었고 모두 매니저가 되길 원했습니다.” “2000~2010년 때 교육시스템이 발전했는데 거기에도 매니저 지향성이 강하게 남아 있었어요. 하지만 2010년 이후부터 변화가 일어났지요. 지금은 생산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공학, 기술 분야가 중요해졌고 그와 관련된 수학, 정보과학, 컴퓨터, 심지어 건축도 중요해요.”
거리의 풍경을 따라 걷다
옐친 센터. '보리스 옐친 박물관'이 이 안에 있다. 사진/필자 제공
올랴와 엘랴가 인상적이었다고 방문을 권해 가 본 옐친 센터의 ‘보리스 옐친 박물관’은 그날 하필 휴관이었다. 90년대 격동기의 러시아 상황이―그러나 옐친을 중심으로―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이니 그 시절을 모르는 자매에게는 현대사와의 신선한 만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박물관을 보지 못한 채 센터 내의 옐친과 그의 가족사진, 옷 등을 보면서 어안이 벙벙한 느낌이었다. 그가 이 지역 출신이긴 하지만, 이는 마치 개인 우상화 전시장 같았기 때문이다.
옐친 센터 내부에 옐친과 그의 가족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사진/필자 제공
예카테린부르크에서는 길에 그려진 붉은 선을 따라가면 도시의 여러 역사·문화 유적들을 손쉽게 만날 수 있다. 그중 ‘문학 지구’라 불리는 우랄작가연합박물관은 ‘19세기 우랄의 문학 생활’ 박물관(‘20세기...’도 있다), 우랄 지역 작가들의 집-박물관들, 문학 작품을 연극으로 올리는 연합박물관 소속 실내 소극장, 인형 및 아동 도서 박물관 ‘이상한 나라’ 등 여러 공간들의 복합체이다. 게다가 <문학 지구>라는 잡지도 간행한다.
‘19세기 우랄의 문학 생활’ 박물관 담당자인 마리나 크랴젭스키흐 씨는 장장 1시간 반 동안 그곳을 안내했다. 이 건물은 우랄 출신 작가 마민-시비랴크(1852~1912, 마민은 본명, 시비랴크는 필명)의 첫 번째 사실혼 아내였던 마리야 알렉세예바(1847~1921)의 집으로, 마민이 들어가 함께 산 곳이다. 그런데 마리나 씨가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그들의 사랑과 파국보다 내 귀를 번쩍 뜨이게 한 것은 그녀의 다음 말이었다. “마민-시비랴크의 친구 가린-미하일롭스키는 한국(조선)을 여행하고 민담을 채록한 책을 출판해 러시아에 처음으로 소개했어요!”
우랄작가연합박물관 산하 실내소극장이 피의 교회 바로 근처에 있다. 프롤레타르스카야 거리라는 주소명이 뒤에 보이는 피의 교회와 대비되어 아이러니해 보인다. 사진/필자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