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후진국'이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는다. 대신 '저개발국', '개발도상국'이란 단어로 순화한다. 국제개발협력용어집에 따르면 '선진국에서 채택하고 있는 기술, 지식과 제도가 아직 충분히 보급되지 않아 산업의 근대화와 경제개발이 뒤처지고 있는 나라'를 의미한다.
한국은 개도국이란 단어가 내포한 발전가능성을 실현한 '산 증인'이다. 개도국에 대해 선진국이 제공하는 유무상 차관이나 기술전수 등 물질적·비물질적 도움인 '공적개발원조(ODA)' 수혜국에서 50년 만에 공여국으로 거듭난 국가.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소개할 때 빼놓지 않는 수식어다. 특히 최근에는 'K방역' 열풍으로 개도국에 해주던 '지식공유사업(KSP)' 같은 경험 공유와 노하우 전수 역할을 선진국에 대해서도 수행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협력'이란 단어가 '지원'보다 적합하다는 점은 보편성을 얻고 있는 듯하다.
용어까지 다듬어가며 개발협력 상대국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이유는 그들이 외교 상대국이기 때문이다. '선의'에만 기반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한국의 도움을 받고 성장한 국가와의 돈독한 관계는 국제사회의 '소리 없는 전쟁'에서 든든한 우군 확보를 보장한다. 미중 갈등 속 재무장을 시도하고 외교에 한국보다 몇 곱절 공을 들인다는 일본이 개발협력에 힘 쏟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경제적 효과도 톡톡하다.
그런데 유독 북한을 상대로 한 개발협력에는 수혜적 시각이 팽배하다. 한 남북보건의료협력 전문가는 통일부 내 '인도지원'부서가 생겼을 당시 북한 외교관에게서 "제발 인도지원이란 말을 쓰지 말아달라. 너무 자존심 상한다"는 요청을 들었던 일화를 소개하며 이런 고민을 토로했다. 현재 통일부 부서들은 '교류협력'·'인도협력'·'남북협력'이란 명칭을 사용하지만, 여전히 북에 들어가는 모든 물자는 '인도적 지원'이라는 명목에서만 유엔 제재를 피할 수 있다. 북도 남도 원치 않지만 극복할 수 없는 딜레마다.
국내적으로도 대북지원은 평화 통일과 민족 단결이라는 헌법적 목표 실현에 포석을 까는 행위임에도 늘 '퍼주기' 논란에 시달려 왔다. 분단 상태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수십 조원의 국방비보다 아까워하기도 한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북이 외부 지원을 받지 않겠다며 남측의 도움을 거절한 사정에는 남북미 대화 경색 상황보다 이런 국내외적 딜레마가 더 크게 자리했을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 되면서 한·미 민주당 간 대북공조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바이든 당선인이 과거 햇볕정책을 지지했었다는 증언이 나오고, '김대중·클린턴'의 '찰떡 호흡' 재연을 염원하는 목소리도 높다. 이에 외교당국과 국회, 학계에선 미 바이든 진영을 설득하고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지지를 호소하는 물밑 외교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이제는 정말 우리가 용기를 내야 합니다." 30년간 매일 노동신문을 읽었다는 한 북한전문가는 늘 이렇게 호소한다. 남북협력을 가로막는 국내외적 딜레마를 극복할 용기 말이다. 한쪽은 벌써 꿈틀대고 있다. 그리고 그 용기는 국내적 결집력을 얻을 때 더욱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남북협력에 대한 개념과 인식전환이 절실한 때다. 사실 직접적인 전쟁의 위협을 계속 머리 위에 얹고 사는 문제는 정치 성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최서윤 정치팀 기자 sabiduria@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