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지영 기자] 정유업계가 올해 사상 최악의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코로나19 백신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백신이 보급되면 이를 운송하기 위한 항공·선박유 수요 증가와 함께 전반적인 연료 경기 회복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21일 정유·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올해 정유 4사의 연간 합산 적자는 5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 1위 SK이노베이션은 연결 기준 3분기까지 2조2400억원의 적자를 내며 규모가 가장 컸고 에쓰-오일은 1조1800억원으로 다음이었다. 이어 GS칼텍스는 8700억원, 현대오일뱅크는 5100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3분기까지 정유 4사의 합산 적자는 4조8100억원에 달한다.
지난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한 주유소에서 주유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국제유가 올라도 정제마진 '제자리걸음'
이 가운데 4분기도 수요 회복이 더뎌 흑자 전환은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다. 현대오일뱅크와 에쓰-오일은 영업이익을 낼 수 있을 것이란 전망도 나오지만 SK이노베이션과 GS칼텍스의 적자 규모가 커 올해 연간 합산 영업손실은 5조원을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산유국들의 갈등으로 국제유가가 폭락했던 2014년 적자의 5배 이상이다. 당시 정유사들의 합산 영업손실은 7500억원 규모였는데 SK이노베이션과 에쓰-오일은 30여년 만에 낸 적자였다.
최근 국제유가가 오름세를 타고 있지만 정제마진이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정유업계의 시름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정제마진은 정유사의 수익 지표로, 휘발유·경유 등 원유 가격에서 수송·운영비용을 뺀 값을 말한다.
12월 둘째주 싱가포르 복합정제마진은 배럴당 0.5달러로, 국내 정유사들의 손익분기점인 4~5달러에 한참 미치지 못한 수준이다.
국제유가가 상승 중임에도 정제마진이 부진한 것은 코로나19 백신으로 원유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는 기대는 커졌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즉 기대감 때문에 국제유가가 올랐지만 석유 제품 판매는 여전히 부진해 정제마진 상승으로까지 이어지진 않은 것이다.
이에 따라 산유국 연합체인 OPEC+는 내년 1월 석유 증산을 계획보다 줄이기로 했다. 이들 국가는 당초 하루 200만배럴 증산을 계획했는데 50만배럴만 늘린다는 계획이다.
한편 국제유가는 꾸준히 오름세를 타고 있다. 18일(현지시간) 기준 미국 서부텍사스원유(WTI) 선물 가격은 전날보다 1.5% 상승한 배럴당 49달러대를 기록했으며 이는 10개월 만의 최고치 경신 기록이다.
충남 서산시 소재 현대케미칼 공장 전경. 사진/현대오일뱅크
"백신·탈석유만이 살길"
이처럼 수요 회복이 더디면서 정유사들은 코로나19 백신 보급만 바라보게 됐다. 백신이 보급되면 이를 운송하기 위해 항공과 선박유 수요가 늘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특히 대륙 간 백신 운송은 항공기가 주로 담당할 가능성이 커 항공유 소비가 늘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가 한번씩 맞을 수 있는 분량인 78억도즈의 백신을 운송하려면 보잉 747 화물기 8000대를 꽉 채워야 한다.
정유사 매출에서 항공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기준 약 14% 수준이다. 해외여행 제한으로 올해 석유 제품 중에서도 항공유 타격이 심했던 만큼 백신 수송이 본격화하면 정유사 수익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백신으로 코로나19 확산세가 잠잠해지면 이동 제한이 풀려 자동차나 기차용 등 전반적인 연료 수요도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코로나19 백신으로 경기가 회복된다 해도 정유사들은 장기적인 관점으로 '탈석유'를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친환경 자동차 등 연료 패러다임이 바뀌며 석유 산업은 사양화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다수 정유사는 석유화학 포트폴리오를 강화하거나 주유소 플랫폼화, 배터리 개발 등으로 사업 구조를 다각화하고 있다. 현대오일뱅크의 경우 석유화학 등 비정유 부문 사업을 일찌감치 확대한 덕에 올해 1분기를 제외하곤 영업이익을 냈다. 흑자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다른 정유사들이 모두 줄줄이 적자를 냈던 것과 비교하면 선방했다는 평가다.
이에 따라 에쓰-오일도 석유화학을 현재의 2배 이상으로 키운다는 방침이다. 이밖에 SK이노베이션은 전기차 배터리, GS칼텍스는 전기·수소차 충전이 모두 가능한 미래형 주유소로 탈바꿈해 수익을 개선한다는 계획이다.
김지영 기자 wldud91422@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