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수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변호사
총체적 불신의 시대이다. 믿을 사람도 없고, 믿을 기관도 없다. 개인에 대한 불신이야 어느 사회에서나 일정 정도는 있을 수 있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불신을 받는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기관들이 총체적 불신을 받는 상황은 당연하지 않다.
2019년 보건사회연구원이 '한국인의 행복과 삶의 질에 관한 종합연구'를 수행하면서 19~80세 국민 502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을 때, 입법부(정당 및 국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23.83%에 불과했다. 사법부(법원)과 행정부(중앙부처 및 지방자치단체)에 대해서 '신뢰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각각 41.69%, 42.13%다. 검찰과 경찰에 대해선 '신뢰한다'는 응답이 39.09%에 그쳤다. 거의 모든 주요 국가기관이 국민 절반의 신뢰도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지금 상황이라면 이런 불신은 점점 더 커졌을 가능성이 크다.
정치권과 언론은 이런 불신을 줄일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지엽적 말싸움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래서는 국가공동체의 미래가 어둡다. '누가 더 나쁘냐', '누가 더 믿을 수 없느냐'를 갖고 벌이는 말싸움은 낭비적일 뿐만 아니라 진짜 중요한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공론장을 없애기 때문이다. 따라서 2021년에는 이런 '불신 국가'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에 대해 논의하고 추진해나가야 한다.
국가기관들이 불신을 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기본적으로 투명하지 못하고, 책임성도 없고, 정보도 폐쇄적인 구조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주권자들인 국민들에게 최대한 정보가 제공되어야 하지만 현실을 보면 국민들은 뒤늦게 통보받는 수준이다. 그러니 신뢰가 생길 수 없다.
또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려면 주권자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할 기회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분야에 따라서 참여의 방법이 달라질 수는 있지만, 아예 참여가 봉쇄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재판은 판사가 하고, 입법은 국회의원이 하며, 행정은 관료가 하는' 현실이다. 이런 나라는 민주국가가 아니다. 결정은 소수가 하고 주권자인 국민들은 그저 따르기만 해야 한다면 그건 독재국가나 다름없다. 진짜 민주국가는 재판에도 국민이 참여하고 입법에도 국민이 참여하며 행정에도 국민이 참여하는 나라여야 한다.
이런 나라들은 지구상에 존재한다. 스웨덴과 덴마크 같은 북유럽의 국가들은 일찍부터 정보공개 제도를 도입하고, 시민의 입장에서 행정을 감시·통제하는 옴부즈맨 제도를 정착시켰다. 미국은 추첨으로 뽑힌 시민들이 재판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배심재판을 해 왔고, 수사와 기소단계에서도 시민들이 참여하는 기소배심(대배심) 제도를 운영했다. 스위스 같은 나라는 국민발안 제도를 통해서 입법과정에 국민들의 참여를 보장해 왔고, 최근에는 핀란드같은 나라도 국민발안 제도를 채택했다.
이런 모범적인 사례들이 보여주는 공통점은 '중요한 일일수록 국민들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엘리트들은 민주주의의 기본을 망각하고, 국민들을 통치의 대상으로 봐 왔다. 주권자들에게 권력을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이라도 제대로 했으면 모르겠으나 기득권 엘리트들은 국가공동체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이제는 주권자들이 직접 참여해서 국가공동체의 일에 개입하는 수밖에 없다. 진정한 국가개혁은 주권자인 국민들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2021년을 주권자들의 실질적인 참여를 보장하는 제도개혁 원년으로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 이미 엘리트들에 의한 개혁은 한계에 부딪힌 상황이고, 2022년 대선을 앞둔 시기이므로 국가적인 개혁과제를 공론화하기에 좋은 시기이기도 하다.
법률을 고쳐서 풀 수 있는 건 법률을 고쳐서 먼저 추진하고, 헌법을 고쳐야 하는 건 개헌논의를 다시 불붙여서 풀면 된다. 정보공개 제도의 실효성 강화, 국민소송 제도 도입, 국민참여예산제 강화, 검찰에 대한 시민통제 제도(기소배심 또는 일본식 검찰심사회) 도입, 중요한 문제에 대한 추첨제 시민의회 도입, 지방자치에서 주민소환·주민투표 제도의 실효성 강화 등은 법률로도 가능하다.
헌법개정과 관련해서도 국민들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국민발안과 국민소환, 실질적인 배심재판 도입 등을 먼저 논의해야 한다. 마침 야당의 당명도 '국민의 힘'과 '국민의 당' 아닌가. 만약 야당이 국민들에게 권력을 돌려주자는 데 반대한다면 당명에서 '국민'이라는 단어부터 빼야 할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미룰 수 없는 절박한 과제다. 부디 2021년이 진정한 국민주권을 실현해나가는 첫 해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하승수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