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임채운 서강대 교수
흔히 중소기업의 위상을 언급할 때 9988이라고 한다. 중소기업이 우리나라 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99%이고, 고용에서의 비중은 88%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에 중소기업은 많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중견기업은 적은 편이다.
기업의 목적은 성장이며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팽배하다. 왜 중소기업이 성장을 기피하는 ‘피터팬’ 현상이 발생하는 것인가?
한국에서 중견기업이 증가하지 않는 이유는 매우 복합적이다. 우선은 우리나라 산업구조가 양극화돼 완제품을 생산하는 대기업과 대기업에게 부품을 공급하는 중소기업으로 이원화돼 있기 때문에 독자적인 중견기업이 사업을 키울 수 있는 여건이 안된다.
대기업의 일감 몰아주기도 중소기업의 성장기회를 억제한다. 대기업이 내부 시장(Captive Market)을 이용해 다앙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어 전문 중견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부족한 것이다. IT, 광고, 물류, 건물관리, 급식 등의 사업서비스 부문에서 특히 이런 현상이 심하게 나타난다. 이에 따라 상당수 중견기업은 숙박, 음식, 식음료, 의료, 건설, 부동산 임대, 가구 등의 내수 산업에 종사하고 있어 기술혁신과 글로벌화에 관심이 적다.
중소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보호가 중견기업으로 성장동기를 위축시키기도 한다. 중소기업에게 많은 지원이 제공되는데, 중소기업 범위를 벗어나 성장하면 이런 혜택과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중소기업의 사업영역을 보호하기 위한 시장규제 때문에 내수 시장에서 중견기업이 공격적으로 성장을 추구할 경우 중소기업과 소상공인과의 경쟁이 심화되고 갈등도 야기돼 규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중소기업이 정부 지원에만 의존하는 관행 때문에 '기업가 정신'이 쇠퇴된 탓이라고는 비판이 제기된다. 어느 나라이건 경제적 약자인 중소기업에게 정부가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시장실패 현상이 심해 시장에서 소외되는 중소기업에게 정부가 직접적인 지원과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이런 지원과 혜택이 과도할 경우에 기업가정신을 위축시켜 혁신과 성장에 투자하지 않고 모험을 기피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정부의 정책은 개별 기업에게 직접적인 지원을 제공하기 보다는 시장구조를 개선하고 기업가정신이 보상받는 민간생태계를 조성하는 방향으로 전환돼야 할 것이다.
현재 중소기업 지원은 다수의 중소기업에게 보편적 지원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이뤄지고 있다. 앞으로는 성장잠재력이 높은 기업에게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과 혜택을 성장과 연계해 중견기업을 성장하려는 동기를 자극해야 한다. 특히 내수시장을 벗어나 해외시장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유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책자금 지원에 있어서 수출성장이 우수한 중소기업에게 대출금리를 우대해 주는 것이 대표적 예이다.
대기업의 부당한 내부 거래를 규제해 일감 몰아주기를 근절함으로써 독립적인 전문 중견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시장을 형성해 줘야 한다. 대기업에게 납품하는 중소 협력기업에 대한 전속관계를 완화해 타사에게도 공급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대기업에게 쏠려 있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해소해야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질 수 있다.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요소는 혁신기술, 글로벌화, 인재유치다. 성장잠재력이 높은 중소기업에게 R&D, 수출, 인력양성에 있어서 파격적인 지원과 혜택을 제공해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해외시장 진출을 도와 성장을 추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임채운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