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일제 강제징용 손배소 각하…"강제집행은 권리남용"

대법 전원합의체 판결과 배치되는 판결
"개인 청구권 소멸 안 됐지만 소송으로는 행사 못해"
"확정판결·강제집행 시 우려되는 국제적 역효과 고려"

입력 : 2021-06-07 오후 3:54:54
[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낸 대규모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7일 각하됐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재판장 김양호)는 이날 강제징용 피해자 송모씨 등 85명이 일본제철·닛산화학 등 16개 기업을 상대로 낸 86억원 손해배상 소송을 각하했다.
 
재판부는 "개인 청구권이 청구권 협정에 의해서 바로 소멸되거나 포기됐다고 할 수는 없다"면서도 "소송으로 이를 행사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라고 각하 이유를 밝혔다. 원고 승소 판결이 확정돼 강제집행할 경우 권리남용이라는 판단도 했다.
 
한·일청구권으로 소송 행사 제한
 
재판부는 각하 사유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과 비엔나조약을 들었다. 재판부는 "청구권협정 2조는 대한민국 국민과 일본 국민의 상대방 국가 및 그 국민에 대한 청구권까지 대상으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며 "청구권협정을 국민 개인의 청구권과는 관계없이 양 체약국이 서로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만을 포기하는 내용의 조약이라고 해석하기 어렵다"고 전제했다.
 
이어 "이 조항에서 규정하고 있는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해결'이나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라는 문언의 의미는 개인청구권의 완전한 소멸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이나 일본 국민을 상대로 소로써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한·일 청구권 협정 2조는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4조에 규정된 것을 포함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돼 있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이 각하된 7일 원고 측 소송 대리인 강길 변호사가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항소 방침을 알리고 있다. 사진/이범종 기자
 
"국내법적 사정으로 강제집행 안돼"
 
한국이 국제법을 위반할 가능성도 각하 근거였다. 재판부는 비엔나조약 27조를 근거로 들었다. 이 조항은 "어느 당사국도 조약의 불이행에 대한 정당화의 방법으로 그 국내법 규정을 원용해서는 아니된다"고 적혀있다.
 
재판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국내법적 사정만으로 식민지배의 적법 또는 불법에 관해 상호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일괄해 이 사건 피해자들의 청구권 등에 관해 보상 또는 배상하기로 합의에 이른 '조약'에 해당하는 청구권협정의 '불이행'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며 "대한민국은 여전히 국제법적으로는 청구권협정에 구속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한민국과 일본국 사이에 그동안 체결된 청구권협정 등 각종 조약과 합의, 청구권협정의 일괄처리협정으로서의 성격, 각국 당국이 이 사건과 관련해 한 언동 등은 적어도 국제법상의 '묵인'에 해당해 그에 배치되는 발언이나 행위는 국제법상 금반언의 원칙에 위배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이 때문에 재판부는 법원의 청구 인용과 강제집행이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금반언의 원칙 등 신의칙을 위반함으로써 판결의 집행 자체가 권리남용에 해당돼 청구이의의 소 및 그 잠정처분의 대상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원고들의 청구를 인용하는 본안판결이 선고돼 확정되고 강제집행까지 마쳐질 경우에 국제적으로 초래될 수 있는 역효과 등까지 고려하면, 강제집행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질서유지라는 헌법상의 대원칙을 침해하는 것으로 권리남용에 해당해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재판부는 "헌법기관으로서 헌법과 국가 그리고 주권자인 국민을 수호하기 위해 이와 같이 판결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당초 10일로 예정됐던 선고기일을 이날 갑작스레 앞당긴 데 대해서도 "법정의 평온과 안정 등 제반사정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원고 측 "부당하다...항소 예정"
 
원고 소송 대리인 강길 변호사는 "현 재판부 판단은 기존 대법원 판결과 대치된다"며 "기존 대법원은 심판 대상 자체를 인정했기 때문에 현 재판부 판결은 부당하다. 항소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강 변호사는 "일단 강제징용 상태에서 임금도 받지 못한 부당한 상황이기 때문에 최소한 임금과 그에 해당하는 위자료는 배상 해야 한다"며 "양국 관계도 그 기초 위에서 재정립돼야 한다"고 말했다.
 
송씨 등 피해자들은 강제 노동을 하고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해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다며 지난 2015년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은 송달 등 문제로 기일이 변경돼 소장 접수 6년째인 지난달 28일 변론이 열렸다.
 
앞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2018년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고 임정규 씨의 아들 임철호(왼쪽) 씨가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일본제철 주식회사와 닛산화학 등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이 각하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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