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현직 법원장까지 비판에 나섰다. 지난 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재판장 김양호)가 내린 판결 얘기다. 재판부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85명이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각하 판결했다. 손해배상 청구권이 없다는 게 각하 이유다.
그럴 수 있다. 헌법상 법관은 직업의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한다. 때문에 하급심이더라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배치되는 판단을 내리는 것을 불법이고 부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기자는 같은 이유로, 판결에 대한 비판은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단, 그것이 법해석에 충실한 판결일 때에 그렇다.
이번 판결에 대해 국민적 비판이 확산되고 있는 이유는 재판부가 든 판결의 근거로 든 정치적·역사적·외교적 배경 때문이다. 판결문을 본 여러 전·현직 법관들이 지적하는 그 '사족' 말이다. 재판부는 총 40여 페이지에 달하는 판결문에서 상당부분을 '사족', 즉 국제조약에 대한 해설에 할애했다.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이에 터잡은 징용의 불법성은 유감스럽게도 모두 국내법적인 법해석'이라는 결론을 내기 위한 전개다.
법관이 판결문에 관련 국제조약에 대한 해설을 적시하는 것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이번 판결문 저변에 짙게 깔린 한일 관계에 대한 이번 재판부의 역사관은 그대로 보아 넘기기 힘들 정도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이에 터잡은 징용의 불법성은 유감스럽게도 모두 국내법적인 법해석"이라며 부정했다. 국제법상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근거가 없다는 얘기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원인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부정한 것이다.
이는 일제 강점을 불법이 아니다라고 선언한 바와 다르지 않다. 더구나 재판부는 "일본국을 포함한 어느 나라도 자신들의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했다는 자료가 없고 국제법적으로도 그 불법성이 인정된 바가 있다는 자료가 없다"고 했다. 우리 국민은 피눈물을 쏟고, 일제 전범들은 '반자이'를 외칠 노릇이다. 참으로 개탄스럽다.
황병하 광주고법원장은 지난 9일 법원 내부 온라인 통신망인 코트넷에 올린 글에서 재판부의 이 주장은 '난센스'라고 꼬집었다. 법관이 다른 법관의 판결을 공개적으로 왈가왈부 않는 것은 사실상 금기며 미덕이다. 법관들도 서로 독립돼 있음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2년 법관 경력의 황 고법원장이 코트넷에 글을 올린 심정은 오죽했을까.
이번 판결은 항소심과 상고심에서 뒤집힐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얼마 남지 않은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에게 남은 시간은 정말이지 촉박하다. 이 사건만 해도 소장 접수부터 1심의 각하 판결을 받기까지 6년의 세월이 걸렸다. 대법원에서 판결을 확정받을 날이 언제일지는 요원하다.
어디 강제징용 피해자들 뿐인가. 같은 재판부가 비슷한 이유로 청구를 기각한 위안부 피해자들은 차치하더라도, 다른 일반 사건에서도 법원의 해괴한 논리로 1심에서 권리구제가 좌절된 국민들 중엔 돈이 없거나 시간이 남지 않아 상소를 포기하는 이들이 없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번 판결이 그래서 더 오싹하다.
최기철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