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가 세계인을 사로잡고 있다. 지난 9월 글로벌 OTT 서비스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오징어게임은 한국 드라마 최초로 전 세계 1위에 올랐다. 이후 46일 동안 정상을 지켜 최장기간 1위 기록을 새로 썼고, 누적 시청자 수 역시 1억4000만가구를 훌쩍 넘기며 종전 최고치를 뛰어넘었다. 현재는 지옥이 그 배턴을 이어받아 원작인 웹툰까지 인기를 얻으며 K-스토리의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아티스트들의 성과도 눈부셨다. 배우 윤여정은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고, 새로 발표하는 곡마다 빌보드 차트를 휩쓸고 있는 방탄소년단(BTS)은 2년 연속 그래미 어워드에 노미네이트됐다. 엔터 분야에서의 선전이 더해지는 사이 콘텐츠 수출 효자인 게임도 글로벌 시장으로 영토를 넓혀가며 묵묵히 제 역할을 했다. 이에 <뉴스토마토>는 5회에 걸쳐 K-콘텐츠가 걸어온 길을 조망하고 K-콘텐츠 전성시대를 열어갈 미래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뉴스토마토 배한님 기자] 2021년은 K-콘텐츠, 특히 K-드라마의 해였다. 킹덤 시리즈로 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K-드라마는 올해 D.P.·오징어게임·지옥 등으로 신드롬을 일으키며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한국의 콘텐츠 산업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4.1%로 국내총생산(GDP) 점유율인 1.9%의 2.2배 수준이다. 특히 영화와 애니메이션 등 콘텐츠 산업 점유율은 10%에 육박한다. 한국은 명실상부한 영상 콘텐츠 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오징어게임 포스터. 사진/넷플릭스
그러나 성공한 한국 영상 콘텐츠는 대부분 지식재산권(IP)을 독점하는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서비스됐다. 한국이 글로벌 OTT의 콘텐츠 하청기지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이유다. 이에 업계는 IP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 국내 영상 콘텐츠 투자 재원을 확보하고 토종 OTT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의 국내 콘텐츠 진입을 놓고 업계는 '양가감정'을 갖는다. 막대한 자금이 유입되면서 국내 제작 시장이 활성화되는 동시에 저작권 문제나 국내 방송 생태계 교란 등 우려도 생겼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등 해외 자본은 국내 제작사가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줬다. 넷플릭스는 콘텐츠 제작 전부터 전체 제작비의 110%를 제공해 제작사가 흥행 여부와 관계없이 제작비를 회수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동시에 IP를 넷플릭스가 독점해, 콘텐츠가 크게 성공하더라도 추가 수익을 올릴 수 없다는 한계도 안겨줬다. 오징어게임 성공 이후 딘 가필트 넷플릭스 정책총괄 부사장이 "한국의 창작자들이 만든 콘텐츠 성공은 우리가 과거 예상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현재 추가 수익 배분을 논의 중"이라고 밝혔지만, 이는 일시적인 방안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IP를 소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제작사들이 넷플릭스와 일하는 이유는 소극적인 국내 영상 콘텐츠 투자 환경 때문이다. 서장원 CJ ENM 정책전략실장이 "최근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제작비가 없어서 좋은 콘텐츠를 못 만든다는 소리를 듣고 안타까웠다"며 "넷플릭스는 200억, 300억짜리를 만드는데 우리는 50억, 100억짜리도 못한다"고 지적한 것처럼 넷플릭스 진입 전까지 국내 영상 콘텐츠 시장 투자는 그리 크지 못했다.
지옥 포스터. 사진/넷플릭스
넷플릭스는 올해만 한국 시장에 5억달러(한화 약 5500억원)를 투입했다. 내년에는 투자 규모가 더 늘어날 전망이다. 넷플릭스의 콘텐츠 재투자율은 2011년 12%에서 2019년 74%까지 증가했다. 지난 11월 국내 서비스를 시작한 디즈니플러스도 한국 오리지널 콘텐츠 확보를 위해 투자 기회를 엿보고 있다. 한국 진출을 준비하고 있는 HBO맥스도 마찬가지다. 천혜선 미디어미래연구소 연구위원에 따르면 지난 2019년 기준 국내 콘텐츠 재투자율은 32%다. 반면 미국 다채널방송사업자(MVPD)의 콘텐츠 재투자율은 58.2% 수준으로 상당히 높다.
김세원 한국방송채널진흥협회 정책기획팀장은 "유독 한국방송시장은 하이리스크 로우리턴(High Risk Low Return) 공식이 들어간다"며 "콘텐츠를 잘 만들었을 때도 돈을 벌 수 없는 구조다"고 꼬집었다.
업계는 IP 주도권을 확보하고 국내 제작사가 충분히 성과 배분을 받기 위해서는 '다양한 콘텐츠 투자 재원 확보'와 '토종 플랫폼 육성' 두 가지가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고 말한다. 넷플릭스 외에도 투자 재원을 마련할 길이 필요하며, 해외 플랫폼이 IP를 독점한다면, 우리는 이를 공유하는 플랫폼을 자체적으로 키워내야 한다는 것이다. K-콘텐츠를 제작해 유통하는 것만으로는 성장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콘텐츠 투자 재원 확보를 위해 영상 콘텐츠 업계는 세제 지원을 요구한다. 콘텐츠에 투자했을 때 세금을 감면해 주면 재투자를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콘텐츠 투자 세제 지원율은 25~40%에 달한다. 반면, 한국은 대기업 3%, 중소기업 10% 수준이다. OTT는 지원 대상도 아니다. 현재 OTT의 콘텐츠 투자 세제 지원을 명시한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이 제출된 상태지만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와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의 견해차로 1년 반 넘게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천혜선 연구위원은 "한국은 정부의 투자 지원 정책이 직접 제작 지원이나 공공, 중소기업 투자 위주로 흘러간다"며 "대형 프로젝트에 민간 자본이 많이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는 직접 투자보다 투자했을 때 세제 혜택이나 긴급 펀드를 받을 수 있게 하는 등 투자 문화를 조성하는 간접적인 지원제도가 오히려 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콘진원)도 IP 확보를 위한 투자 재원 확보 방안을 고민 중이다. 조현래 콘진원장은 "IP 문제는 돈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조 원장은 "내년도 조직개편으로 금융 파트를 독립시키고, 투자사와 콘텐츠 업계가 네트워킹하는 만남의 장을 만들어 서로 기대하는 바를 교류하는 장을 자주 갖게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토종 플랫폼 육성을 위해서도 자율등급제·세제 지원 등이 규제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CJ ENM이나 KT스튜디오지니 등 국내 사업자들이 대규모 콘텐츠 투자를 진행 중이지만, 글로벌 시장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플랫폼도 그만큼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문화체육관광부는 내년 업무 계획에 'OTT 자체 등급 분류제 도입'을 포함했다. 조현래 콘진원장도 "OTT 플랫폼을 영상 콘텐츠의 하드웨어 중 하나로 바라보고 지원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고 전했다.
배한님 기자 bh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