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윤 한국사회여론연구소장
이번 대선의 특징 중 하나는 선거전을 관통하는 시대정신이나 '그랜드 아젠다'가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1년 넘게 대선 캠페인이 진행중이지만 내용은 빈약한 편이다. 공과나 찬반을 떠나 각 대선 마다 그 대선을 특징짓는 아젠다가 있었다.
1997년 대선(김대중 후보 당선)은 국가부도 탈출과 경제회복이었다. 2002년 대선은 노무현 후보가 제기한 '반칙없는 세상'과 '국토균형발전'이 선거전 내내 이슈였다. 2007년 대선은 이명박 후보의 '한반도 대운하' 건설이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이 후보의 'BBK 의혹'도 주요 쟁점이었지만, 대운하 논쟁은 밀려나지 않았다(물론 한반도 대운하는 나중에 4대강 개발로 변형됐고, 많은 상흔을 남기며 환경문제에 커다란 재앙이자 논란 거리로 내연중이다). 2012년 대선에서는 박근혜 후보측이 제기한 '경제민주화'가 기억에 남는다. 비교적 진보적인 아젠다를 보수 후보가 선점, 이른바 진보진영은 주도권을 뺏긴 형국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집권 4년차인 2016년,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탄핵에 시동이 걸린다. 이른바 국정농단 사태. 2016년 10월24일 JTBC 8시뉴스는 태블릿PC 한 대로 시작했다. 그 태블릿에서 어마어마한 내용이 쏟아져 나왔고 전국은 일거에 들끓었다. 이후 6개월 동안 촛불이 타올랐고, "이게 나라냐" "우리가 주인이다"라는 구호가 울려퍼졌다. 결국 이듬해 3월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을 결정했고, 5월 '촛불 대선'이 치러졌다. 문재인 후보는 '적폐청산'과 '국가개조'를 제시했다. 다른 후보들의 담론은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번 대선을 관통하는 아젠다나 시대정신은 뭘까. 여지껏 제기된 공약이나 아젠다 중 기억나거나 첫 손에 꼽을 만한 게 있는가. 이재명 후보가 '기본 소득'을 들고나왔으나 당내 예비경선 과정에서 논란 끝에 '유보'라는 옷을 입고 일단 수면 아래로 잠긴 상태다. 다른 후보에게서 특별히 기억날 만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아젠다란 뭔가. 한 문장으로 압축하자면, '사람들로 하여금 얘기하게 하는 것'이다. 찬성이든 반대든 얘기하게 하는 것. 아젠다 세팅의 주도권을 잡으면 이후 논의 과정에서 우위에 서게 되고, 그 아젠다를 계속 이슈로 끌고 가는 과정, 즉 이슈 파이팅에서도 유리한 지점에 서게 된다. 그래서 국정운영이나 선거에서 이슈 선점이 중요하다. 선점. 단순히 먼저 제기한다고 선점되는 게 아니라 시대정신, 즉 사람들이 원하는 것, 그리고 제시했을 때 사람들이 찬성이든 반대든 계속 말하게 되는 것이어야 선점이다. 그게 여론주도권을 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선은 대장동과 무속, 후보 배우자 주가조작 논란-공적 자원의 사적 유용(법인카드), 처가 비리 등 옮기기에도 민망할 불법적-비도덕적 요소들이 차고 넘치는 '리스크 홍수'다. 오죽하면 유력 정당들에서 "후보 잘못 골랐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튀어나왔고, 심지어 여론조사 질문지에 "후보교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항목이 등장하기까지 했다.
사정이 이 지경에 이르다 보니 정책 실종은 당연했다. 정책이 실종됐으니 비전 또한 있을 수 없었으며, 미래 한국에 대한 담론 역시 설 자리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가장 빈약한 대선이다. 주요 후보들의 도덕적 약점 때문에 '혐오감 대선'이라고도 하지만, 정책 면에서 빈약한 대선이라는 것은, 적어도 앞으로 5년 동안 우리가 몰두할, 또는 관심 갖고 논의할 의제가 없다는 얘기다. 뼈 아픈 지점이다. 물론 앞으로 인수위 과정이나 새 대통령의 취임사 등을 통해 국가적 의제는 설정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선거를 통해 국민적 판단과 동의를 구하지 못했는데, 인수위 두어 달 동안 뚝딱 만들어낼 비전이나 아젠다가 얼마나 탄탄할 것인가라는 점에서 아쉬움을 떨치기 힘들다.
이번 선거가 왜 시종일관 빈약한 대선으로 흘렀을까. 대선은 항상 심판과 미래 담론이 동시에 다뤄진다. 심판은 고정 상수다. 필자는 선거 구도보다는 후보들 자체의 리스크에서 원인을 찾는다. 1년 넘게 후보 본인과 가족의 온갖 문제로 공방이 그치지 않았고, 논란은 해소되지 못한 채 투표 1주일을 앞두고도 오리무중인 게 태반이다. 그 사이 '혐오 대선'이라는 표현이 일반명사가 돼버렸다. 어느 정도가 되어야 혐오 대선을 면할 수 있는가. 어느 정도여야 '후보(가족) 리스크'가 주 이슈가 아닌 선거일 수 있는가. 이번 대선이 던지는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싶다.
이강윤 한국사회여론연구소장(pen337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