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전보규 기자] 참정권은 누구나 보장받아야 하는 기본권 중 하나다. 대다수는 아무런 불편함 없이 선거에 나온 후보자의 정책을 비교·판단하고 투표를 통해 권리를 행사한다. 하지만 발달장애인들에게는 꿈같은 얘기다. 어렵고 함축적인 말로 전해지는 공약은 이해하기 어렵고 글자와 표로 채워진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는 일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발달장애인들은 공약을 알아듣게, 지지하는 후보에게 표를 던질 수 있게 해달라고 수년간 목소리를 높였지만 달라진 게 없다. <뉴스토마토>는 연중기획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차별 받지 않을 권리'를 연재한다. 발달장애인들의 참정권 침해 문제는 그 첫번째 이야기다.(편집자주)
"장애인 유권자는 헌법에 명시된 참정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발달장애인도 함께 할 수 있는 그림 투표용지를 만들어달라."
발달장애인들이 또 거리로 나와 외쳤다. 그저 선거에 나온 후보자의 공약을 이해하고 원하는 사람에게 투표하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 때문이다. 이들은 염색체 이상 등 여러 원인으로 같은 또래에 비해 신체적 또는 정신적인 발달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다. 발달장애인 유권자수는 20만명에 달한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와 한국피플퍼스트를 포함한 7개 단체가 모인 '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위한 대응팀'은 제20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 첫날인 지난 4일 서울 종로장애인복지관 앞에서 '장애인의 완전한 참정권 보장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 내내 '가오나시' 분장을 한 발달장애인들이 '발달장애인도 대한민국의 유권자이다!', '공직선거법 개정하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돌아다니는 퍼포먼스도 진행됐다. 가오나시는 선거철마다 보이지 않는 유령 취급을 받는 발달장애인을 상징한다. 퍼포먼스를 했던 발달장애인들은 분장한 상태로 사전투표에도 참여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와 한국피플퍼스트 등 7개 단체가 모인 '장애인 참정권 확보를 위한 대응팀'이 지난 4일 서울 종로장애인복지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사진=뉴스토마토)
참정권 보장 대응팀은 "민주적 선거제도가 도입된 지난 70여년간 국민의 참정권을 보장하기 위한 많은 제도개선과 법개정이 이뤄졌지만 장애인을 고려한 정책은 언제나 가장 마지막 순서였다"고 지적했다. 특히 발달장애인은 공직선거법에 명시조차 되지 않아 유권자로서 다른 유권자들과 동등한 정보 등을 전혀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발달장애인이 거리에서 참정권을 보장해달라고 목소리를 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한국피플퍼스트는 2016년 출범 이후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보장을 꾸준히 요구해왔다. 대선과 국회의원 선거, 지방선거, 보궐선거 등 선거 때면 어김없이 외쳤다. 하지만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반영된 게 없다.
이해하기 쉬운 선거 공보물과 그림 투표용지를 만들고 투표소에 조력자를 동반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게 발달장애인들의 요구이다. 후보자의 공약을 알아듣게 그리고 지지하는 후보에게 도장을 찍을 수 있게 해달라는 얘기다.
함축적 한자어나 개념어로 가득한 선거 공보물, 표와 글자로 채워진 데다 기표란이 좁은 투표용지는 발달장애인의 제대로 된 투표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발달장애인 박경인씨는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 원활하고 글자를 읽고 뜻도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지적장애가 있어 어려운 단어나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제한이 따른다. 이로 인해 일반적인 선거 공보물에 나온 정책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2012년 처음 선거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정책적 선호에 부합하는 후보인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상태로 투표에 참여했다.
다른 발달장애인 임종운씨는 눈에 익숙한 한글 통 글자 몇 개를 읽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외의 글자는 읽고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임씨는 혼자 기표소에 들어갔을 때 후보자를 식별할 수 없었고 자신이 선호하는 정당이나 후보자에 관계없이 무작위로 도장을 찍고 나온 경험이 있다.
김성연 장추련 사무국장은 "현재 공직선거법은 장애인의 참정권을 전혀 제대로 보장하고 있지 않다"며 "다음 선거에는 이런 기자회견이 필요 없이 자기가 원하는 후보에게 편안하게 한 표 행사할 수 있도록 국가는 국민인 장애인의 참정권 보장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보규 기자 jbk8801@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