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서태지 데뷔 30주년을 맞아, '권익도의 밴드유랑'은 그간 깊이 다뤄지지 않고 오히려 잘 다뤄지지 않아 간과돼 왔던 부분들을 탐구해보고자 한다. 서태지 음악이 한국 대중음악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미쳐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의미를 갖는 이유가 무엇인지 더 자세히 들여보는 내용들이 될 것이다. 평소 서태지가 추구해온 음악적 정신이 ‘큰 울림’이라고 줄곧 생각해왔다. 지난 시간 그것을 가슴으로 느껴왔다면, 이제는 머리로써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며 세상과 호흡해보고자 한다. >> 참고기사,
(권익도의 밴드유랑)“서태지 음악은 타협 없는 모어앤뉴”
올해 데뷔 30주년을 맞은 뮤지션 서태지. 사진=서태지컴퍼니·서태지아카이브
세계가 덜컹거리는 때가 있다.
22일 오후 4시, 낮의 해가 서서히 고개를 감춰갈 무렵, 서울 논현동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반추의 그림자를 서서히 늘어뜨렸다.
“태지 형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 음악을 안 하고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드네요.”
“드럼 실력의 단계를 1~10이라 놓고 보면…”이라며 열 손 가락을 치켜들었다. “처음엔 2~3단계였죠. 자칫 5단계에서 끝날 뻔 했던 음악 인생이 지금은 8~9단계까지 왔어요. 성장한 거죠.”
서태지밴드 드러머 최현진. 동그란 안경과 짧은 머리, 콧수염. 그의 별명은 ‘원장님’이다. 미용실 원장님 같은 외모라서. 그러나 가운 대신 가죽재킷을, 가위 대신 드럼 스틱을 장착한 그는 어쩌면 미용사보다 더 세밀하고 정교할 것이다. 서태지 음악 엔진을 책임지는 ‘칼박’의 감각만큼은.
2008년 서태지 8집 '아토모스(Atomos)' 활동부터 최현진은 서태지밴드 드러머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최현진
최현진은 2000년부터 메탈코어 밴드 ‘바세린’에서 활동했다. 서태지 8집 ‘아토모스(Atomos)’ 활동 직전 서태지밴드 기타리스트 탑(안성훈)의 제안으로 드러머 오디션을 봤다.
2008년 4월 초, 서태지컴퍼니 직원이 ‘인터넷 전쟁’ 드럼 파트를 촬영해갔고, 며칠 뒤 피드백이 왔다. “연주는 괜찮은데 액션이 조금 아쉬운 것 같다.”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 ‘슬픈 아픔’-‘헤피 엔드’까지 큼직한 동작을 더해 재촬영했더니 “직접 보고 싶다” 연락이 왔다.
같은 해 초여름, 서태지컴퍼니 스튜디오. 서태지와의 첫 대면은 세계가 덜컹대다가, 이내 표백되고야 마는 경험이었다.
거실에서 만나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오디션에 들어가자 머리가 백지장이 돼 버렸다. “2m 앞 의자에 태지 형이 앉아 있었고..” “1시간 가량 드럼을 치긴 쳤는데 어떻게 쳤는지 기억이 잘 안나요.” 서태지로부터 돌아온 답은 “연주가 나쁘진 않은데, 컴백기간까지 공연 곡들을 소화하기엔 부족할 수 있겠다”는 것.
“사실 태지 형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합류 못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날 같이 칼국수 먹고 아쉽지만 기분 좋게 집에 갔어요.”
2008년 서태지 8집 '아토모스(Atomos)' 활동부터 최현진은 서태지밴드 드러머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최현진
다음날 깜짝 놀랄 연락이 왔다. 서태지는 “당장은 아쉽지만 충분히 가능성은 있을 것 같다”며 연습 의사를 물었고, 그렇게 극강의 연주 훈련이 시작됐다. 자택 의정부에서 오가는 시간이 아까워 논현동 연습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연주에만 골몰했다. ‘눈뜨고 연습하고 밥 먹고 연습하고...’ 하루 20시간씩, 손이 갈라지고 피가 나도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서태지는 8집 데모 버전의 드럼 파트를 주고 매일 밤 10시경 1~2시간 가량 성과를 체크했다고. 그리던 어느 날, 서태지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같이 해봅시다.”
“인생에서 손꼽을 만큼 짜릿한 기억입니다. 먹고 자는 것만 빼면 드럼 연주만 머릿속에 가득했죠. 그게 또 행복일 줄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그가 정식 멤버로 입성하고 처음 세상에 나온 8집 ‘아토모스(Atomos)’는 지금도 서태지 전체 커리어의 최대 노작(勞作)으로 평가받는다. 잘게 쪼개지는 드럼 비트가 앨범 전반의 성격을 규정할 정도로 비중이 크다.
당시 라이브를 준비하던 서태지의 지휘 방향은 하나였다. 원곡에 최대한 충실할 것. 연습 때 ‘첫번째 마디의 3번째 노트는 지금보다 약간 더 크게, 4번째 노트는 더 작게 연주해 주세요~’라는 식으로 서태지는 세밀하게 챙겼다고. “‘모아이’는 노트수가 기본적으로 많아요. 마디 안에 억지로 리듬을 우겨 넣는 느낌인데, 맛깔나게 쳐야죠. 이렇게 느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녔어요. ‘와, 내가 이런 것도 되네?’”
2014년 9집 음반 ‘콰이어트 나이트(Queit Night)’ 때는 드럼 편곡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서태지가 찍어준 미디 드럼 파일을 듣고 그가 직접 리얼 드럼으로 전환했다. 2주 간 서태지컴퍼니 스튜디오에서 악기와 컴퓨터 사이를 수백번 오가며. 서태지는 메일로 파일만 받고도 하이햇 쪽 마이크를 조금 더 옮겨 달라는 식으로 피드백을 보내며 점검했다.
2014년 서태지 9집 '콰이어트 나이트(Quiet Night)' 활동 당시 최현진은 디지털 드럼 패드를 직접 제작했다. 사진=최현진
서태지밴드의 드러머는 ‘기묘한 과학자’가 되는 일이기도 했다. 호기심 눈을 반짝이며 세상에 없는 것을 창조해내는...
‘소격동’ 라이브 준비 땐 디지털 드럼 제작에 들어갔다. 구로동 공구상가를 뒤지고, 직원들과 전기컨트롤 박스 위치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밤낮으로 연구했다. 여러 번 실험 실패 끝에 최종 작을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15개의 샘플 패드에 연결된 20개의 음정과 빛이 은은하게 발하는 전구들. 스틱으로 패드를 가격하면, 멜로디 요정이 튀어나올 듯, 무대가 일순간 북유럽 밤하늘로 변한 것은 그의 노고 덕이다.
“처음엔 ‘드럼 꿀인데?’ 생각했죠. 근데 그러시는 거예요. 특유의 그 천진한 미소로. ‘이거(소격동) 멜로디 현진 씨가 쳐야 해요. 예쁜 빛도 났으면 좋겠고.’ 그때부터 눈 내리는 나무 느낌의 LED 파이프 같은 것도 제작해봤고, 밤낮으로 잠이 오질 않았어요. 손으로 각 샘플 패드의 파트별 멜로디를 치고 발로는 리듬을 연주하고, 또 중간에 조그만 건반도 치고, 제일 어려운 곡으로 돌변해 있었죠.(웃음)”
이 디지털 드럼엔 연결된 케이블이 많아, 전국 투어 때 해프닝도 있었다. 당시 리얼드럼과 디지털 드럼을 각각 놓은 360도 회전 무대로 연출을 하곤 했는데, 공연스텝의 실수로 이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 케이블이 전부 뽑힌 것. 20여분 공연 멈춤 사태가 일어났지만 서태지는 오히려 담담하게 무대 위에서 관객들과 사소한 얘기를 나눴다고. “모든 상황을 머릿속에 염두에 두고 있는 분이라서요..”
활동기 때 서태지 스튜디오는 흡사 군대 같은 전우애를 방불케 한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아티스트와 테크니션, 매니저, 엔지니어, 10명 넘는 인원들이 음악 열정 하나 만으로 북적대며 똘똘 뭉친다. “힘듦에서 오는 날카로움 같은 거, 느낄 새도 없어요. 태지 형은 무대며 조명이며 모든 것을 다 통제하시니.. 내색은 안하셔도 본인이 제일 힘드셨을 거예요.”
서태지 밴드 멤버들, 탑(왼쪽부터), 서태지, 닥스킴, 강준형, 최현진. 사진=최현진
그도 학창시절에는 ‘널 지우려 해’ 같은 곡의 기타를 카피해 친구들 앞에서 연주할 정도로 ‘서태지 키드’였다. 25주년 기념 공연 때 ‘아이들’ 시절 곡들부터 최근 9집까지 라이브로 구현한 그는 “‘널 지우려 해’에서 느꼈던 시원한 느낌을 떠올려 보면 서태지 음악은 언제나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며 “쉽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아주 단단하고 옹골찬 음악들을 한 무대에서 연주하며 이질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돌아봤다.
현재 그는 개인 연습과 학교 강의(국제예술대)에 매진하고 있다. 스스로 삶에는 ‘운도 중요하고 노력도 중요하다’는 철학을 갖고 학생들을 대한다.
“학교에는 ‘내가 늦은 거 아닌가, 부족한 거 아닌가’ 하며 서두르고 촉박해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저는 그런 친구들에게 얘기해줘요.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딱 1년 만 연습 제대로 해보라고. 그럼 분명 달라질 거라고.”
인간 서태지에 대해서는 “친근한 동네 형”이라고 했다. “지내다보니까 꼼꼼한 성격도 배울 점도 많고, 이 사람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기 낳고는 조금 더 유해지기도 하셨고.. 지내다보면 또 연락이 오겠죠. 불현듯. (웃음)”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