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포퓰리즘의 시대를 살고 있다. 포퓰리즘의 유행은 세계적이다. 프랑스에선 극우 정당의 마린 르 펜이 대통령 결선 투표에 올랐고, 베네수엘라의 차베스가, 헝가리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던 오르반이 장기집권에 성공했다. 의회주의 국가 영국에서도, 연방제와 대통령제의 국가 미국에서도 패라지와 트럼트와 샌더스가 돌풍을 일으켰다.
한국 정치 역시 포퓰리즘의 전성기를 구가중이다. 전문가들은 문재인 정부에서 포퓰리즘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음을 지적한다. 책 <대통령의 숙제>에서, 사회학자 한지원은 한국 정치를 장악한 포퓰리즘의 기원이 초대 대통령 이승만임을 증명한다. 이승만은 여론전과 합법적인 선거를 독재의 수단으로 삼았다. “민주국가에서는 그 나라도 민중이 만든 것이고 헌법도 민중이 만든 것이니 민중이 원하기만 하면 헌법이나 정부나 국회나 무엇이든지 고칠 수 있다.” 이승만의 말이다. 그리고 이 언설이야말로 포퓰리즘의 핵심이다.
한지원에 따르면,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를 다수 여론의 지배로 이해하며, 정치적 경쟁보다 정적의 청산을, 합리적 제도보다 대중의 열광을, 집단적 숙의보다 영웅적 결단을 선호하는 정치 성향을 지칭”하는 용어다. 한국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울려퍼지는 정치적 구호들은, 이승만식 포퓰리즘 정치의 변주다. 진보 혹은 민주화 세력을 자처하는 이들이 포퓰리즘에 더욱 몰두하는 것도 한국식 정치의 단면이다. 그들은 민주주의와 여론을 내세워 정적을 ‘청산’하려 하고, 미디어로 대중을 흥분시켜 합리적 토론을 무산시킨다. 촛불정부를 자처한 문재인 청와대에서 탁현민 같은 행사 연출가들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승만을 증오하는 민주화 세력이 의외로 이승만과 닮”은 셈이다.
한국사회의 정치적 포퓰리즘이 지속되면 벌어질 수 있는 비극을 경고하기 위해, <대통령의 숙제>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두 나라를 분석한다. 베네수엘라는 1990년대 말까지 민주주의 지표에서 8~9점을 얻던 중진국 중 최상위권 민주주의 국가였다. 하지만 현재 베네수엘라의 상황은 참극 그 자체다. 놀라운 점은 이런 변화가 베네수엘라 국민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10%의 경제성장율을 겪던 시기, 우고 차베스가 21세기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빈곤층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었고, 그는 급진적 분배정책을 통해 빈곤율의 하락에 성공하는 듯 보였다. 게다가 유가 상승으로 베네수엘라의 경제가 호황을 구가하자 남미엔 좌파 정부 열풍이 불었고, 차베스는 이를 틈타 개헌을 단행했다. 이후 유가의 하락과 더불어 베네수엘라의 경제는 50년 전으로 추락했다. 반미선동과 석유 이익 분배를 통해 여론을 장악한 정부는, 과학과 경제학에 근거한 제도들보다 여론에 의존한 정책을 펼쳐나갔고, 포퓰리즘에 타락한 민주주의는 경제와 안보에 치명적 문제를 야기했다. 이탈리아의 상황도 비슷하다. 이탈리아의 사례는 선진국이라 하더라도 민주주의가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으며, 포퓰리즘이 경제를 침몰시키고, 엉망이 된 경제가 다시 포퓰리즘을 키우는 악순환의 고리를 보여준다
여론이 곧 민주주의라고 착각하는 포퓰리즘 정치 하에서, 과학적 태도의 결핍은 필연적이다. 모든 국민이 천동설을 믿어도, 지구는 태양 주위를 회전한다. 과학적 진실은 때로 여론과 대치한다. 근대학문이 축적해온 전문성과 그들이 발견한 사회운영의 법칙들은, 여론과 상관없이 작동한다. 한지원은 과학에 근거한 제도를 무시하는 포퓰리즘의 대표적 사례로,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을 지적한다. 대다수 경제학자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소주성 정책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문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률은 평균 7.3%로 박근혜 시기의 7.4%보다도 낮다. 초반 2년간 14%로 급격히 최저임금을 높인 이후, 이후 3년간 평균 3%로 오히려 낮춘 결과다. 도대체 무엇이 소주성 정책 추진을 가로막았을까. 한지원은 바로 최저임금 인상률이 소주성에 대한 여론의 악화와 정확히 일치함을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최저임금 결정 과정은 문재인 정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여론이 곧 민주주의이며, 여론이 과학적 진리보다 우위에 있다는 믿음 말이다.”
많은 학자와 정치인이 포퓰리즘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뾰족한 대안이 있는건 아니다. 나는 포퓰리즘 사회가 과학적 사회의 상극이라는 점에서, 포퓰리즘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 과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그 가치의 사회적 적용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희미한 대안을 과학사회학자 해리 콜린스의 ‘세번째 물결’과 ‘선택적 모더니즘’에서 찾을 수 있다. 콜린스는 현대사회의 정치적 의사결정 대부분이 과학기술과 분리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우리가 정치적 국면과 기술적 국면을 다룰 때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정치적 국면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민주주의적 원리가 작동해야 하지만, 기술적 국면에서는 전문성과 경험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콜린스는 중력파를 발견한 물리학 연구공동체를 수십년간 연구하며, 과학의 가치가 단지 자연을 발견하는데만 있지 않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민주적 원리의 구성에도 존재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전문성에 대한 존중 뿐 아니라, 관찰에 대한 존중, 정직성, 진실성, 무사무욕, 보편주의, 조직된 회의주의, 반증과 개방성, 재현 가능성 등, 과학자사회가 자연을 발견하기 위해 구축해온 가치들은,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만드는데에도 필수적이라고, 콜린스는 주장한다. 우리는 이런 과학의 가치를 ‘선택’할 수 있고, 그렇게 선택하는 가치는 ‘모더니즘’의 가치, 즉 과학이 담보하는 가치라는 점에서, 콜린스는 그의 철학을 ‘선택적 모더니즘’이라고 불렀다. 비전문가들에 의해 과학적 전문성이 훼손되는 포퓰리즘 사회에선 과학의 가치가 훼손되고, 이렇게 과학의 가치가 훼손된 사회는 정치/경제/문화적으로 타락한다. 한국 사회에서, 과학의 가치는 얼마나 존중되고 있는가. 포퓰리즘이 정치를 지배하는 지금, 우리가 반드시 물어야 하는 질문이다.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heterosis.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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