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방준석 추모

입력 : 2022-03-31 오전 6:00:00
26일 토요일 아침, 창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뜬금없이 노래 하나가 생각났다. 평소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 팀의 노래였다. 그 노래가 처음 나왔을 때 부터 이건 방준석을 생각하며 만든 노래일 거라 생각했다. 노래를 만든 이가 한 때 방준석과 연인이었기 때문이고, 노래에서 그리는 시기가 딱 그 때이기 때문이다. 몇 달 전 기타리스트 차승우를 만났을 때 방준석이 상당히 안 좋다는 얘기를 들었던 게 떠올랐다. 그 노래를 떠올리며, 그에게 연락해봐야겠다고 스치듯 생각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카톡 하나가 왔다. 방준석의 부고였다. 황망했다. 내리는 비를 타고 그가 인사를 하러 왔었나 싶었다. 
 
대중에게 방준석은 영화음악 감독으로 많이 알려졌다. 대표적인 작품만해도 <공동경비구역JSA><라디오스타><고고70><베테랑><사도>그리고 유작이 된 <모가디슈>에 이른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 산업은 이전과 다른 영역에 진입했다. 뛰어난 감독과 달라진 제작환경 외에도 재능과 자본을 뒷받침할 수 있는 스탭들 또한 등장했다. 장영규, 달파란과 함께 ‘복숭아 프로젝트’라는 영화음악팀으로 활동했던 방준석도 그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음악 팬들에게 방준석은 그 이전부터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1990년대 대중음악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밴드, 유앤미블루 때문이다. 그들은 1994년 데뷔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3집을 내고, 넥스트가 2집을 냈던 해다. 드디어 한국에 록의 시대가 열린다고, 모두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 때 조용히 발매된 유앤미블루의 데뷔 앨범에는  한국 록을 지배하던 헤비 메탈의 문법이 없었다. U2의 음악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영롱한 사운드가 앨범 전부를 관통하고 있었다. 당시의 한국 록을 지배하던 아젠다이자 이데올로기였던 정열의 록 스피릿이 아니라 허무하고 블루지한 정서가 축축히 배어 있는 작품이기도 했다.한국에 존재한 적 없는 사운드였다. 
 
유앤미블루의 멤버, 이승열과 방준석은 뉴욕 빙햄튼 대학 1학년 때 만났다. 룸메이트였다. 둘 다 음악을 좋아했고 기타를 쳤다. 동양인들이 주최하는 행사에 나가 노래를 불렀다. 이승열은 이승철의 노래를 커버했고, 방준석은 자신의 청소년기를 보낸 칠레의 음악을 불렀다. 자작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서로 기타를 치겠다고 하고 노래는 상대에게 미루던 그들은 자신의 노래를 만들면서 보컬까지 시작했다. 그 노래들을 4트랙 아날로그 녹음기에 담았다. 노래가 쌓여갔다. 4년이 지났다. 이승열과 방준석도 학교를 졸업했다. 이승열은 한국으로 왔다. 방준석은 중국으로 갔다. 아들이 음악하는 걸 못마땅해한 아버지의 사업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방준석도 이승열과 마찬가지로 음악을 하고 싶었다. 놀러 가는 척 하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알고 지내던 방송작가를 통해 온갖 기획사에 자신들의 데모 테이프를 돌렸다. 두 군데서 연락이 왔다. 윤수일이 운영하는 사무실과 송스튜디오였다. 송스튜디오는 조장혁, 정원영, 한충완, 정경화, 한영애 등이 몸담고 있던, 90년대 초반 뮤지션들의 아지트였다. 대표는 사랑과 평화 출신의 송홍섭이었다.
 
송홍섭과 함께, 유앤미블루는 두 장의 앨범을 냈다. 미디어는 주목했지만,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 그들을 알아보는 곳은 초기의 홍대앞 인디신에 국한됐다. 라이브가 가장 큰 무기였지만,  당시의 한국은 그걸 제대로 보여줄 수 없는 저변이었다. 압구정동에서 열렸던 어떤 공연에서 사회자는 그들을 이렇게 소개했다. “유앤미 블루스를 무대로 모십니다.” 방준석은 계단을 오르다 말고 그대로 내려와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행사장을 떠났다. 이승열은 말한다. “방준석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랬다. 그동안 쌓인 것들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인터뷰를 하면 기자들과 싸우기도 했다. 유앤미 블루는 97년 초 가졌던 콘서트를 끝으로 해체했다. 공연이 끝난 직후, 유앤미 블루의 활동 중단 소식을 보도한 ‘중앙일보’의 기사도 옮겨본다.
 
표면상의 이유는 멤버중 이승열이 밀린 학업을 마무리하기 위해1년 예정으로 미국에 머물기 때문. 하지만 주변의 전언은“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상업적인 측면에선 실패하고 만 고국에서의 음악활동에 지쳤기 때문”이란 것.
 
방준석의 빈소는 조용했다. 코로나 시대라 조문객의 수도 적었지만 술이 없었다. 떨어져 앉은 사람들은 나즈막히 이야기를 나눴다. 적막했다. 음악계와 영화계가 반반 비율로 보내온 조화 리본을 보며, 방준석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새삼 느꼈다. 집에 오는 길, 방준석과 백현진을 데리고 제주에 갔던 2013년의 어떤 날을 떠올렸다. 앰프도 마이크도 없이 50명의 관객 앞에서 공연하던 그 날, 방준석이 연주하던 있는 그대로의 기타 소리가 기억난다. 가식없는 점잖음, 드러내지 않는 사려깊음, 그런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던 사람. 방준석은 그런 사람이었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일일공일팔 컨텐츠본부장(noisep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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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