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응열 기자] 금호아시아나그룹 재건과 경영권 회복을 위해 계열사 자금을 빼돌려 임의로 사용한 혐의를 받는 박삼구 전 회장이 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자, 22일 법조계에서는 이례적인 판결이라는 반응이 쏟아졌다. 중형일 뿐 아니라 검찰 구형 그대로 선고됐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박 전 회장의 범죄가 그룹 계열사뿐 아니라 국가 전체에 손해를 끼쳤다고 지적했는데, 사법부가 기업 오너의 도덕성과 사회적 책무에 경종을 울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계열사 자금 횡령·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지난 1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지난 17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4부(재판장 조용래)는 박 전 회장에게 적용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배임 등 혐의 대부분을 유죄로 판단했다. 박 전 회장은 그룹 지주사인 금호산업(현
금호건설(002990)) 지분을 인수하기 위해 특수목적법인 개인회사 금호기업을 만들었는데, 그룹 계열사를 동원해 금호기업을 부당지원하게 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판결이 확정될 경우 박 전 회장은 만 87세가 돼서야 형기를 마친다.
재판부 판결을 토대로 보면 박 전 회장이 횡령·배임한 것으로 인정되는 액수는 최소 6400억원 이상이다. 박 전 회장은 지난 2015년 12월 금호터미널 등 계열사 4곳에서 3300억원을 빼돌려, 개인회사 금호기업이 금호산업 주식을 인수하는 데에 쓰도록 했다. 또 다음해 4월에는
아시아나항공(020560)이 보유하던 금호터미널 주식 전량인 약 1004주를 금호기업에 2700억원에 매각하도록 했다. 재판부 판단에 따르면 적정한 매각대금은 약 5800억~5900억원인데 박 전 회장이 3100억~3200억원 가량 싸게 주식을 사들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박 전 회장은 2016년 8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그룹 9개 계열사로 하여금 금호기업에게 아무런 담보 없이 1306억원의 자금을 대여하도록 했다. 당시 금호기업은 신용대출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박 전 회장은 계열사를 동원해 개인회사의 자금을 지원한 셈이다.
아울러 박 전 회장은 아시아나항공의 기내식 독점 공급권을 게이트그룹에 30년간 저가양도하면서 아시아나항공이 게이트그룹에 추가 수익을 지급하게 하고 그 대가로 금호기업이 게이트그룹에서 1600억원의 자금을 이자 없이 최대 20년간 지원받게 했다. 재판부는 이 같은 거래로 박 전 회장이 50억원 이상 재산상 이득을 취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가 박 전 회장에게 10년이라는 중형을 내린 건, 그룹 재건과 경영권 회복이라는 개인적 목표를 위해 계열사의 막대한 자금을 빼돌려 개인회사를 지원하고 이로 인해 공적자금이 투입된 금호그룹 계열사에 손해를 끼쳤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재판부는 “개인회사를 위해 계열사를 이용하는 행위는 기업경영의 투명성, 건전한 근로의식을 저해하고 소액주주와 채권자 등 자본시장 참여자 다수의 정당한 이익을 해할 뿐만 아니라 유동성 위기나 부실이 다른 계열회사로 전가돼, 종국적으로는 국민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끼치는 등 엄단할 필요성이 매우 크다”고 지적했다. 또 “박 전 회장과 그 가족의 그룹 지배권 회복만을 목적으로, 계열사 자금을 마치 총수 개인의 소유인 것처럼 임의로 사용하는 등 전체 기업집단을 사유화하고 사익 추구 수단으로 삼았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아시아나항공을 비롯한 금호그룹은 한국산업은행과 한국수출입은행 등에서 대규모 공적 자금을 지원받는 등 국민 전체 희생을 바탕으로 경영이 일부 정상화됐는데 박 전 회장 등의 범죄로 인해 재차 그룹 전체의 위기가 야기됐고 그룹 계열사가 분리·축소된 점, 피해를 입은 그룹 계열사들은 중요 국가 기간 산업을 담당한 회사들로, 겉으로 드러난 피해 외에 국가 전체적으로 끼친 무형의 손해가 상당할 것으로 보이는 점 등에 비춰 사안이 매우 중하다”고 판시했다.
아울러 “박 전 회장이 저지른 범행들의 본질은 일부 계열사들의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개인의 그룹 지배권을 회복하겠다는 사익 추구에 지나지 않았다”며 “계열사들 피해액 합계가 수천억원에 이르고 피해 회복도 제대로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시아나항공의 경영 상황이 계속 악화되고 기업 이미지가 실추돼 현재까지도 완전히 복구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과거 사법부는 재벌 총수에 대해서 ‘3·5(3년 실형, 5년 집행유예)’ 공식으로 불리던 ‘솜방망이 처벌’로 비판을 받곤 했다.
실제 지난 2007년 서울중앙지법은 900억대 공금을 횡령하는 등 배임·횡령 혐의로 기소된 정몽구 전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현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고 항소심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8400억원 사회공헌, 사회봉사명령을 선고했다. 정 전 회장은 파기환송심까지 재판을 끌고 간 끝에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300시간의 사회봉사 명령을 확정받았다.
특경가법상 횡령 등으로 재판을 받은 고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도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받았다.
그러나 사법부가 박 전 회장에게는 징역 10년이라는 중형을 내리면서, 법조계 관계자들은 사법부가 재벌 총수 등 화이트칼라 범죄에 칼을 빼든 것이라고 평가했다.
재경법원 부장판사 출신의 변호사는 “박 전 회장의 횡령·배임 액수가 큰 점을 양형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지청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검찰 구형보다 선고형이 낮은 관행에 비춰보면 이번 판결은 일반적이지 않다”며 “박 전 회장 보석도 취소해 법정구속했는데, 재판부가 그만큼 죄질을 안좋게 본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항소심에서 감형될 여지도 있겠지만 최근 법원에선 하급심 판결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어, 자백 또는 피해 변제 같은 양형요인이 달라지지 않는 이상 형량이 줄어들 가능성은 낮다”고 덧붙였다.
이번 판결이 유사 사건 선고에서 하나의 판단기준이 될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판사들이 선고할 때 기존의 판례를 참고하는 만큼, 이번 판결을 반영할 경우 기업 오너의 범죄 형량이 전보다 강화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재경법원의 한 판사는 “이 판결은 법원 내부에서도 주목하고 있다”며 “기존에는 재벌 총수들이 집행유예를 받는 경우도 많았으나, 최근 사회적 분위기가 기업오너의 도덕성과 책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고 이번 판결도 이를 어느정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 만큼, 앞으로는 유사 사건에서 집행유예를 배제하는 등 처벌이 전보다 세질 가능성이 열렸다”고 말했다.
서울시 소재 한 법원 내 법원 마크. (사진=뉴시스)
김응열 기자 sealjjan11@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