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혁명
길 위를 달리는 것
그리하여 가슴이 뜨겁게 달구어지는 것
뜨거워져야
쇠도 칼이 되고 보습이 되고
흙도 달항아리로 태어난다.
뜨거워야 사랑도 하고
뜨거워야 언어가 시가 된다.
무엇이라도 되려고 길 위에 달린다.
이것이 나의 혁명이다.
현실을 딛고 먼 곳으로 달려가는 것.
처음 내가 달리기를 시작한 것은 건강상의 이유였다. 그러다 차츰 달리면서는 마주치는 모든 것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먼저 사람과 눈맞춤을 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사물과 눈맞춤을 하고 인사를 했다. 그러자 나는 내 주위에 모든 사물과 인사를 나눈 사이가 되었다. 인사를 나눈 사이와 그렇지 않은 사이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인사를 나눈 다음 애정이 생겨났다.
내가 인사를 나눈 모든 생명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한 인식이 싹텄다. 내가 만난 사람들의 받는 부당하고 터무니없는 대우에 울분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제 내가 달리는 이유는 모든 억압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들과, 조국의 평화 통일을 위한 무저항 비폭력 투쟁이며 혁명이다. 피 대신 땀 흘려 싸우는 혁명이다.
민중은 언제나 억압과 피탈이 가장 심할 때마다 지배 권역과 불평등에 맞서 끊임없이 저항하며 떨쳐 일어났다. 프랑스 혁명·러시아 혁명과 비견될 동학혁명, 그러나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처럼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전주는 동학농민군이 위대한 승리를 거둔 승전지이자 집강소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적인 통치기구가 설치되었던 민주주의의 출발점이자, 이후 근대역사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민중들에게 가장 처절하게 투쟁하고 실패로 끝난 미완의 혁명이기 때문에 더욱더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140년 전 혁명의 심장이었던 전주감영에서 출발하는 발걸음에는 그날의 함성과 북소리가 울리듯 가슴 벅차다. 그들은 기울어지는 나라를 바로잡고 외세를 몰아내고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어도 그 정신이 이어져 광주혁명과 촛불혁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동학혁명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태풍 전 날 하루 종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전주감영에서 출발하여 완주 책박물관까지 뛰는데는 3시간가량 걸렸다. 절룩거리며 뛰고 걷다보니 보통 사람 빠른 발걸음 정도의 속도 밖에 안 나온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시대 삼례역과 군산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할 수탈된 양곡을 쌓아넣던 곡물 창고였다고 한다. 그곳이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아픈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안고 이제는 마음의 양식을 저장할 곳으로 살아있는 공간이 된 곳이다.
이런 색 바랜 역사가 있는 곳에서 내 저서 미래의 희망이 담긴 <유라시아 비단길 아시럽 평화의 길> 강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책박물관이 있는 것만으로도 문화의 도시 삼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으니 과연 문화의 힘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완주군수가 사주는 점심 식사를 하고 다시 3시간 반 정도 달려서 일산 원불교 총부로 갔다.
민성효 중앙교구장을 비롯한 몇몇 교무들이 비를 맞으며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민성효 교무는 일행들에게 총부의 탑들의 내역을 일일이 일행들에게 설명하면서 전산종법사님의 탑돌이 시간을 기다렸다. 종법사님은 나의 먼 여정의 무사완주를 기도하시겠다며 염주와 함께 금일봉을 내려주셨다.
원불교는 소태산 박중빈이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회상을 열었고, 2대 종법사 정산종사가 “한울안 한이치에 한집안 한권속이 한일터 한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는 원대한 꿈을 설파하면서 자리를 잡은 종교이니 이것이 나의 꿈이 되었다.
강명구 평화마라토너가 지난 5일 전주감영에서 출발해 완주 책박물관까지 평화달리기를 뛰고 있다. (사진=강명구 평화마라토너)
강명구 평화마라토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