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밖에선 보이고 안에선 지우는 서글픈 날 오늘도 견디네.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비의 빛을 보여줘.'(-아래로-)
지난 21일 오전 11시,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에 위치한 한 건물의 지하 3층까지 내려가는 길. 어둠 속 노란 메모장 글귀들에선 반딧불처럼 영롱한 빛이 새어 나왔다.
"이 공간 처음 구할 때 '여긴 안돼' 했어요. 계단을 내려오다보면 땅 파고 내려가는 느낌이 들어서요. 근데 마지막 층 창문에서 하얀 햇살이 들어오는 거예요. 삶 같았어요."
밴드 허클베리핀(이기용, 이소영, 성장규)의 보금자리는 음악과 데칼코마니처럼 닮아 있었다.
올해 데뷔 25주년을 맞은 허클베리핀은 끝나지 않는 항해를 간다. 7번째 정규 음반 '더 라이트 오브 레인(The Light Of Rain·비의 빛, 22일 발표)'은 이전과는 또 다른 모험의 세계다. 제주에서 만든 2018년 6집 '오로라피플' 이후 4년 만. 그 사이 제주에서 서울로 작업실을 옮겼다. 팬데믹의 소용돌이도 지나갔다.
이날 이들의 작업실 겸 스튜디오에서 열린 음악 감상회에서 리더 이기용은 음반 제목('비의 빛')에 대해 "비가 섞인 햇살이 우리를 적셔준다면 어떨까 상상했다"고 했다. 분명한 이들의 자아 투영이다. 2012년 마음의 병을 다스리려 떠난 제주, 자연 속 넉넉했던 치유의 시간, 그리고 서울로 복귀. "25년간 음악을 해오면서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려는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신보는 밖으로 나온 자아가 대도시 서울로 나오며 겪는 이야기입니다. 힘든 시간을 겪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적실 수 있는, 공감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어요. 먹구름 위 햇빛의 희망과 힘처럼..."
밴드 허클베리핀(성장규, 이소영, 이기용). 사진=샤레이블
총 10곡, 세 개의 타이틀 곡('템페스트'·'적도 검은 새'·'눈'). 전체적으로 중후하고 두꺼운 리프와 리듬을 쌓아가던 과거 그런지 록으로부터의 탈피이자, 팝 사운드의 대대적인 수혈이 엿보이는 음반이다.
첫 트랙 '적도 검은 새'부터 찰랑거리는 기타 선율과 질감은 보이 파플로 같은 요즘의 쟁글 팝을 연상시킨다. 여기에 빗물처럼 춤을 추는 비트의 향연, 몽환적인 안개처럼 중저음으로 깔리는 보컬 이소영의 목소리. 이기용은 "팔에 화상 입은 상상의 인물을 적도 부근 상처 입은 검은 새에 비유해본 곡"이라고 했다. "해무가 자욱히 낀 바다 위. 새가 붉은 상처에도 날아 오르면, 상상의 인물과 나(음반의 자아)는 모험을 떠나보기로 결심하는 거죠. 새의 안내를 따라 파라다이스 적도로 가게 되는 겁니다."(이기용)
두 번째 트랙 '눈' 역시 최신 팝 사운드 녹음 경향을 대폭 수용한 점이 눈에 띈다. 일명 '테일 리버브(꼬리처럼 남는 잔향 효과)'라고 하는 반짝이는 기타 선율과 공간감이 크게 느껴지는 공간을 펑퍼짐하게 울리는 드럼의 북 사운드, 기승전결식 악곡 구성. 어느 날 자신의 눈(目)에 비친 마주친 할머니의 뒷모습을 삶처럼 느껴 쓴 노래다. "우산과 지팡이를 두 손에 들고 힘겹게 걸어가시더라고요. 인생이 저런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힘들지만 결국에는 조금씩 앞으로 걸어가는 것. 그런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보내는 것, 저희의 음악이 부드러운 격려의 의미였으면 합니다."
셰익스피어 마지막 작품과 동명에서 차용한 '템페스트'는 원초적인 북 사운드를 앞세우되, 힘을 처연하게 뺀 보컬이 기묘한 이율배반을 이룬다. "과거 트라우마를 씻을 수 없는 아픔들에 대한 곡"이다. "계속해서 시선이 과거로 돌아가는 분들이 있잖아요. 현실을 살지 못하고 있는,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슬펐어요."(이기용) '사랑하는 친구들아 안녕' 후주에는 킹스턴루디스카의 트럼펫터 김정근이 팝적인 리듬감의 금빛 연주를 더했다. 음반은 환경 문제로까지 확장하며 외부세계로 한뼘 더 크게 확장한다. 7번 트랙 '비처럼'은 환경문제에 대한 노래로,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 곡 제목을 재치있게 가사에 삽입했다. 8번 트랙 '금성'은 기후위기를 해결 못하면 머지 않아 지구가 금성과 같은 온도(약 250도)가 될 것이라는 영국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말에서 착안한 곡.
"지구가 금성처럼 변할 수 있다는 호킹 박사의 얘기에 놀랐죠. 이게 과장이 아니었나 하면서. 남극 북극 기사도 찾아보게 되고, 고래의 사체에서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들어 있다는 얘기에 충격을 많이 받았었어요. '비처럼'이라는 노래는 오늘날 바뀐 환경 때문에 비를 맞지도 못하고 숨 쉬는 것도 기계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에요."
허클베리핀 The Light Of Rain 앨범 이미지. 사진=샤레이블
이기용은 이번 음반을 제작하며 그간 끊고 살던 최신 팝과 힙합 음악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두아 리파, 빌리 아일리시, 테일러 스위프트, 마시멜로우, 위켄드의 말랑거리는 전자음악, 드레이크나 트레비스 스캇에서 느껴지는 풍성한 저음과 플로우를. "그 음악들이 차용하고 있는 드럼의 킥이나 베이스부터 보컬과 녹음과 믹싱의 공간감까지, 제가 모르던 사이 현대 대중음악에선 사운드 혁명이 생겼더군요. '소리의 낭만주의' 시대라 생각해요. 그렇다고 해서 허클베리핀의 정체성을 놓은 것은 아닙니다. 셋이 99.9% 모든 악기들을 연주하고 만드는, 저희의 음악임에 분명합니다. 그게 오래된 밴드가 현재를 버텨내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셋이 작업하는 스튜디오의 모습은 흡사 '외로운 세 개의 섬'이다. '따로 또 같이'. 이기용이 곡을 쓰고 나누면, 각자의 악기가 놓인 공간에서 투닥거리며 자기 파트 편곡을 마치고 합치는 방향으로 곡이 나온다. 작업 과정은 흡사 불철주야 대기업 직원들의 모습. 9시 반에 출근해 밤 11시까지 두 달 가량 녹음에 매달린 곡('Sunlight')도 있을 정도다. 이들의 책상 위에는 '0.99의 356승=0.03', '1.01의 365승=37.8'이라는 구호까지 달려있다. "'일(1)'보다 내려가지 말자"는 의미다. 트럼펫을 제외하면 드럼·베이스·기타 편제에 피아노, 신디사이저, 컴퓨터 프로그래밍까지 대부분의 악기들을 세 멤버가 주물러가며 4년간 매달렸다.
델리스파이스, 언니네이발관 같은 1세대 밴드들이 활동을 멈춘 상황에서 사반세기에 달하는 이들의 꾸준한 활동은 의미심장하다. 1집 ‘18일의 수요일’과 3집 ‘올랭피오의 별’ 2장의 앨범을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올렸고, 제5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록 앨범상(2007)을 수상했지만, 이들 스스로는 "어느새 오래 전 일이 돼 버렸다"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어느 순간부터 평단에서도 그렇게 우리 음악을 좋아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우리 안에서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보자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지금도 저희들에게 가장 큰 쾌락과 행복을 주는 것은 영화, 티비보다는 음악이에요. 음악 할 때 행복 호르몬이 마구마구 쏟아집니다."
오는 11월12일 홍대 상상마당에서 '옐로우 콘서트'로 팬들과 만난다. 내년 1월을 목표로 LP도 발매할 계획이다. "가상악기가 많아 몇몇 곡은 어쿠스틱 편제로 준비할까 생각 중입니다. 이전까지 깊이가 있고 어둡기만 허클베리핀은 잊어주세요. 이제는 조금 밝은 모습으로 공생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허클베리핀 멤버, 왼쪽부터 성장규, 이소영, 이기용. 사진=샤레이블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