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밀레 '만종'의 부드러운 햇살 같은 이미지를 상상했다.
지난 21일 오후 4시 경, 서울 마포구 합정동 인근의 한 카페에서 만난 가수 이한철(50)과 2시간 가량 대화를 나누면서다.
8년여간 기타를 들고 전국 시민들과 만나온 그를 음악계의 '포레스트 검프' 같다고 생각했다. 곡식 알갱이처럼 뿌리고 거둔 동그란 음표들은 지금 사회를 잇는 가교(架橋)다.
"농작물도 땅, 바람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잖아요. 몇 년 전 심어놓은 노래들이 이제 서서히 다양한 싹을 틔우는 것 같아요."
이한철은 전국 곳곳을 누비며 일반인들과 음악을 완성시켜오고 있다. 2015년부터 '나를 있게 하는 우리(지자체, 기업, 복지기관, 음악기관 등 지역사회 약 40개 파트너로 구성된 단체·이하 나우)'와 함께 한 음악 프로젝트. 장애인, 암 경험자, 해녀, 시니어... 각각 공통분모를 지닌 그룹에 이한철이 곡의 밑그림을 주면, 저마다 삶의 질곡을 노랫말과 음의 곡선으로 채색해왔다.
"40명으로 시작한 암경험자들과의 프로젝트가 아직도 인상 깊습니다. 지금 7~8명 정도가 세상을 떠났거든요. 서로 장례식장을 찾아 위로하고 다음날 또 모여 즐겁게 음악활동을 하는 모습에 제가 되려 위로 받았습니다. 해녀 분들과 작업 때는 생각지도 못한 '숨비소리'가 가사에 붙기도 했고요.(웃음)"
'괜찮아, 잘 될거야' 가사로도 유명한 곡 '슈퍼스타'의 주인공 이한철. 그가 주축인 밴드 불독맨션은 올해 결성 20주년(1집 발매 기준)을 맞았다. 사진=디에이치플레이엔터테인먼트
음악이 진짜 '삶의 언어'가 된 셈. 음악이 반드시 사회를 투영할 필요는 없지만, 누군가 때론 그 몫을 자처한다. 이한철은 "2005년 발표했던 곡 '슈퍼스타'(솔로 음반 'Organic' 수록)가 음악에 관한 가치관을 바꿔놨다"고 했다.
"당시 야구 선수의 꿈을 포기해야 했던 학생과 상담할 일이 있었고, 그 친구를 위로해주려 만든 곡입니다. '까무잡잡한 스포츠맨'란 노랫말도 그래서 나온거죠. 지금은 화장품 회사 CEO가 됐는데 어느 날 제게 그러더군요. '그 노래가 지금도 자기 삶을 받쳐주는 든든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음악이 사람 인생을 바꿀 수 있구나, 깨달았어요."
팬데믹 초창기, 그의 '괜찮아 잘 될거야'는 전국에 퍼져갔다. 이한철과 동료 뮤지션 18인이 '슈퍼스타'를 재해석한 '방-방 프로젝트'가 유튜브에 공개되면서다. 1~2일 간 각자의 방에서 '슈퍼스타'를 쪼개 녹음하고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다. 수익금을 ‘사랑의 열매’에 전액 기부했다.
"노래도 응원이나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으니까요. 제가 일반인들과 노래를 만드는 이유도 비슷한 거예요. 노래 한 곡으로 끝나지 않고, 그들의 인생에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으면 해요."
최근 2년 사이 고민도 깊어졌다. 선한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자칫 특정 그룹을 '대상화'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스스로의 우려 때문이다. 그는 "2년 전부터 발달장애인과 비장애인, 어르신들과 청년들, 지역의 거점 뮤지션들과 일반인들 식의 '통합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일회성 사회공헌이 아닌 만큼 미세한 안테나를 계속해서 세워갈 것"이라 했다. 10월1일 신도림 오페라하우스에서는 '나우패밀리 콘서트'를 연다. 지난해부터 8주간 울산, 목포, 춘천 등 지역별 뮤지션들과 합작한 디스코 곡들을 들려주는 자리다.
나우(나를있게하는우리) 음악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한철과 지역 뮤지션들. 사진=나우
1993년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동상 수상, 2000년 불독맨션 결성. 이한철의 멜로디 감각이 돋보이는 펑키한 사운드로, 불독맨션은 대중 음악계 평단을 사로잡았다. 정식 데뷔 1집 'Funk'(2002)은 펑크(Funk)와 모던 록이 황금 비율을 이루는 발랄한 애시드 재즈로, 지금 시대에 들어도 크게 이질감이 없을 정도다.
당시 이들 음악은 자미로콰이, 브랜뉴헤비스, 롤러코스터, 델리스파이스 같은 팀들과 함께 늘 거론됐다.
이한철은 "제가 모던 록 느낌의 멜로디를 가져가도 펑키한 스타일로 결과물이 나오곤 했다. 불독맨션은 아직도 음악에 흠뻑 빠졌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올해 결성 20주년(1집 발매 기준)을 맞아 1집 음반의 리마스터링 LP를 준비하고 있다. 2013년 재결성 후 별다른 활동이 없는 상태이지만, 마이클 맥도날드 같은 1970, 80년대 미국 AOR(앨범-오리엔티드 록) 스타일을 들으며 준비 중이다. 연내 공연도 재개할 계획이다.
"4~5곡은 이미 초안이 완성된 상태입니다. 어떻게 보면 과거 불독맨션의 음악도 시티팝과 연장선상에 있는 음악이죠. 프로그래밍된 음들을 빼고 밴드사운드에서 구현한, 불독맨션 만의 새로운 음악이 될 겁니다."
'괜찮아, 잘 될거야' 가사로도 유명한 곡 '슈퍼스타'의 주인공 이한철. 그가 주축인 밴드 불독맨션은 올해 결성 20주년(1집 발매 기준)을 맞았다. 사진=디에이치플레이엔터테인먼트
최근 솔로 작업에도 열중이다. 올해 11월 즈음 국악적 요소(민요, 정가 등)와 전자음악, 시티팝, 모던 록, 보사노바를 결합한 이색적인 음반(8곡 수록 예정)을 내놓을 계획이다.
이날 그는 컴퓨터를 켜 초안으로 만들어 둔 곡들을 본보 기자에게 직접 들려줬다.
매미 소리에 관한 민요 '싸름 타령'이 시티팝의 산들바람 같은 음표와 맞물려 고향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고, 이야홍타령과 보사노바의 화학작용으로부터 고양이울음 소리를 불러내는 식. 'G-A-F샵 마이너' 식의 서양적 코드 진행에, '지화자', '덩기덕' 추임새를 넣는 시김새 창법을 구사하기도 한다.
4~5년 전 '대중음악 작곡가를 위한 국악 수업'을 3~4달 듣고부터 국악에 관한 관심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고. 최근에는 국립국악원의 제안으로 국악 퓨전음악도 직접 만들고 있다.
"그 세계가 또 있더라고요. 요즘엔 콧소리를 끌어올리는 '백꽃타령' 같은 서도민요에 꽂혀 있습니다. 대중음악은 화성이 중요하지만 국악은 코드가 들어가면 재미없어지는 경우가 많죠. 모든 박자가 3박인 국악을 서양음악의 표준인 4박으로 늘리는 과정 또한 흥미롭습니다."
그는 세계 40개국 이상을 다녀온 여행 애호가이기도 하다. 사회 매개의 감각은 '여행의 눈(目)'을 통해 발달하는 것이다.
몇년 전, 동료 뮤지션 하림과 기타를 메고 아프리카를 다녀오기도 했다. "어느 국가 어느 마을만 가도 기타를 연주하면 동네 청년들이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몰려들던 게 생각나요. 추장 아들 집에 초청된 기억도 아찔해요." 한국으로 돌아와 아프리카의 변방 국가 말라위 청년들에게 악기를 선물하기도 했다.
"여행지로 제 음악 여정을 표현한다면? 프랑크푸르트 같은 허브 공간 아닐까요. 보통의 뮤지션들은 마음 속 자신 만의 집을 짓고, 다른 누군가로부터 침범 받지 않는 빨간, 파란 동그라미, 네모 그런 것들을 채워넣잖아요. 그런데 저는 '슈퍼스타' 이후 반대의 길을 걸어온 것 같아요. 함께 그리는 그림, 뮤지션과 비뮤지션을 매개하는 역할. 음악도 여전히 잡식성이고요. 하하."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