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다음 곡은 '만파식적(萬波息笛)'입니다. 코로나 역병에 걸리지 마시고,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신명나는 한 판 들려드리겠습니다."
지난 2일 오후 4시 경, 경기 가평군 가평읍 자라섬 서도. 뮤직그룹 세움(SE:UM)이 무대 위에서 말하자, 객석에서 "얼쑤"가 절로 나왔다.
올해 2월 발매한 음반 'Korean Breath :만파萬波' 수록곡의 축원(祝願)적 연주. 가야금과 장구가 뚱땅거리며 선행하고, 콘트라베이스·트럼펫·알토 색소폰의 화성과 멜로디는 꽹과리·태평소의 장단과 뒤엉키며 한바탕 난장 세례를 벌였다.
산하가 가을 빛으로 물드는 10월,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10월1~3일)이 3년 만에 제자리를 찾았다.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화가 2년 만에 전면 해제된 주말, 자라섬 인근은 세대를 아우르는 인파로 혼잡을 이뤘다. 주최 측 추산 3일간 총 5만여명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됐다.
2일 감상한 현장은, 인재진 총감독이 내년 20주년을 앞두고 선언한 것처럼 "재즈라는 세계 지도에 한국을 표시한 것(지난 8월 기자간담회)"이 맞았다.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10월1~3일). 사진=자라섬재즈페스티벌
오후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땅거미가 질 무렵 굵어졌지만, 관객들은 끝까지 무대 앞을 사수했다. 오히려 우산과 우비에 '톡톡' 하며 떨어지는 빗방울의 천연 사운드가 연주자들의 열띤 재즈 화성·선율, 자라섬의 자연 경관과 앙상블을 이루며 수없는 진경을 만들어냈다.
"BAKSU, BAKSU(박수, 박수). GAZA GAZA(가자, 가자)!" 오후 6시 경, 자라섬 중도에 위치한 메인 무대 '재즈 아일랜드', 이스라엘 색소포니스트 다니엘 자미르가 이국적인 한국말로 호응을 유도하자 거센 빗줄기도 관객들의 기립을 막을 수 없었다.
알토와 소프라노 음역대를 오가는 이 금빛 관악의 즉흥은, 이스라엘 출신 재즈 음악가들이 왜 뉴욕 재즈신의 절반을 차지하는지 여실히 증명한 무대였다. 서아프리카와 인도, 이스라엘 전통음악의 리듬감, 그러나 비밥과 하드밥, 퓨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즈 전통을 운용하는 스펙트럼 넓은 연주 우물에, 존 콜트레인과 찰리파커, 팻 메스니 같은 재즈음악가들의 환영이 스쳐갔다.
이스라엘 신진 연주자들로 결성된 피아노 트리오 '샬로시'는 자미르와 함께 무대에 올라 뒤를 받쳐줬다. 'Meditation' 같은 곡에서 보여준 이들의 선율은 사랑하는 이를 끌어 안는 따스한 체온 같았다. 한국의 거문고 연주자와 함께 국악을 접목시키는 순서도 꾸몄다. 지중해 연안에서 건너온, 이 맑은 확장의 재즈가 한국 가을밤을 낭만으로 물들였다.
폭우 속 무대에 오른 피아노포르테는 4대의 피아노를 올리는 흔치 않은 구성을 펼쳐보였다. 야마하(YAMAHA) 그랜드 피아노 두 대와 로즈(rhodes)사 일렉트릭 건반 2대가 당기고 밀어내는 광활한 음의 파도에, 객석 전체가 숨을 죽이며 이들이 내는 소리에 집중했다.
2일 메인 무대 '재즈 아일랜드'에 오른 샬로쉬&다니엘 자미르. 사진=자라섬재즈페스티벌
역대 최연소로 그래미 3개 부문 후보에 올린 조이 알렉산더 실라(19)는 이 무대를 통해 첫 내한 무대를 밟았다. 웨인 쇼터, 허비 행콕, 윈튼 마샬리스의 찬사를 얻은 이 재즈 신동은 지금이 왜 '알렉산더의 시대'인지를 입증했다.
그가 올해 낸 솔로 음반 'Origin'은 글자 그대로 기원에 관한 깊은 철학적 질문으로 들어간다. 검은 건반과 흰 건반은 단순히 컴퓨터처럼 '0과 1'로만 구성된 세계가 아니었다. 콘트라베이스와 라이드 심벌이 톡톡 터지는 리듬의 음표를 쏟아내면, 알렉산더의 타건은 물처럼 흘러, 사계의 순환과 존재적 물음('Promise of Spring'~'Winter Blues')에 자꾸 닿았다.
2일 메인 무대 '재즈 아일랜드'에 오른 조이 알렉산더. 사진=자라섬재즈페스티벌
2004년 처음 개최한 자라섬재즈페스티벌은 지난해 기준 58개국, 1200여팀의 아티스트가 거쳐 간 행사다. 비가 오면 물에 잠겨 쓸모없는 땅으로 버려졌던 척박한 섬은 이제 세계 재즈를 대표하는 문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첫 회부터 행사를 이끌어온 인재진 총감독은 간담회 당시 "버려졌던 황무지 섬이 음악으로 새 생명을 갖게 된 셈"이라며 "이후 대한민국 야외 음악 공연 축제들의 동력이 됐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대중음악 축제가 지속가능성을 유지하려면 출연진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닌, 독자적인 문화의 축적과 운영 철학이 중요하다.
올해도 자라섬은 한 국가를 선정해 음악과 음식, 문화를 소개하는 ‘포커스 컨츄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스페인을 주빈국으로 설정하고 전통 민속음악 플라멩고부터 모던재즈까지 소개했다. 행사 기간에는 스페인 영화와 피아노 콘서트를 결합한 ‘시네마 스테이지’ 같은 문화 행사도 마련됐다.
자라섬의 자라 춤을 남녀노소 따라 추고 가족 단위로 재즈를 들으며 뛰노는 다정한 광경. 단순 음악 축제에서 벗어난 확장성이 재즈 팬을 비롯해 세대를 아우르는 축제 고유의 문화가 된 셈이다. 인재진 총감독은 음악 축제가 시간 축적에 따라 무형문화재 같은 문화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기획에 접근하고 있다.
오랜 기간 운영하다보니 나름의 체계적인 '행사 프로토콜'로, 선진적 운영에도 만전을 기한다. 올해도 우천에도 전력 공급 중단이나 인명 피해 없이 모든 무대가 정시에 시작한 점 또한 인상적이었다.
2일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을 찾은 관객들 모습. 사진=자라섬재즈페스티벌
계명국 자라섬 감독은 본보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대부분이 초창기부터 함께 해온 스탭들이고, 9번쯤 비를 경험해 이제는 '비 스트레스'에 단련이 된 상태"라며 "무대 뒤 대비 텐트를 세우고, 악기가 원활히 연주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식으로 실무적 차원의 준비를 했다"고 했다.
또 "1회 때는 중도로 들어가는 다리가 무너진 적도 있었지만, 19년을 거치며 이젠 관객 안전에 만반의 준비가 된 상태"라며 "오히려 올해는 우천 속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켜준 관객들에게 감사했다. 다니엘 가르시아나 아비샤비 코헨의 경우, '(우천 시) 이렇게나 많은 관객이 끝까지 자리를 지킨 무대를 본 적이 없다'며 엄지를 치켜 들었다"고 했다.
류희성 재즈피플 기자(한국대중음악선정위원) 역시 "몇년 전까지만 해도 (자라섬의 경우) '도심 밖 피크닉' 느낌이 강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번엔 재즈를 좋아하는 분들이 더 많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류 기자는 "조이 알렉산더를 아는 분은 국내에 소수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마지막 곡을 호명하면서 열광하는 모습, 우천 시에도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모습을 보며 놀랐다. 재즈 음악을 이제는 보컬 중심이 아닌 연주 중심으로 소비하는 흐름이 많아 졌다는 것을 느꼈다"고 돌아봤다.
2일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전경. 사진=자라섬재즈페스티벌
그러나 최근 팬데믹 이후 우후죽순으로 재개되는 대중음악 페스티벌 중에는 정확한 방향성과 장기적 플랜, 선진적 운영 노하우 없이 진행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자라섬과 비슷한 기간에 열린 '부산국제록페스티벌 2022'(10월1~2일, 사상구 삼락생태공원)은 22년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어설픈 운영으로 뭇매를 맞았다.
실제로 2일 메인 무대에서는 밴드 넬의 공연 도중, 전력이 갑자기 나가 공연이 30분 가량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넬 관계자는 본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공연 도중 발전차가 갑자기 꺼진 것은 20년 간 대중음악 공연 현장을 다니면서 처음 본 상황"이라며 "전날 새벽 도착해 사전 리허설(사전 연습)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주최 측 운영상의 문제로 사전 연습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실제로 전력 중단 사고에 따라 이후 혼네와 크라잉넛 등의 밴드도 연쇄적으로 지체됐다.
주최 측의 대응 또한 아쉬운 부분으로 지적된다. 기본적인 태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공연 현장에서 문제가 일어날 수는 있어도 대처를 빨리 하는 것이 중요한데, 부산락페의 경우 운영자가 상황에 대한 설명이나 고지를 적시에 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는 "부산락페의 경우, 기획사나 재정사가 몇년을 주기로 계속 바뀌었다. 처음 지역행사에서 시작했고 역사에 비해 아직은 컨소시엄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며 "한편으론 2009년 '오버킬 참사'(밀어닥친 밀물로 감점의 위협 때문에 밴드 오버킬의 공연 중단 사태)를 상기하면 더한 일도 있던 게 사실이지만, 이번 주최 측 대응은 아쉬운 것 같다"고 했다.
최근 '울트라 코리아 2022'(9월24~25일, 잠실 종합운동장)는 코로나 직전 환불 논란사태를 무시하고 정상개최를 강행했다. 2019년 갑작스런 장소 변경에도 별도의 환불정책을 펼치지 않아, 뭇매를 맞다 끝내 환불 정책을 발표했으나, 구객 문의에도 묵묵부답식으로 그 절차를 지금까지 지연하고 있다.
2020년 1월 조정안이 나왔으나 주최 측인 유씨코리아는 조정안이 정한 기한 내에 환불을 마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조정 결과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에 환불을 둘러싼 소비자-업체 간 분쟁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민사 소송 등 법적인 절차를 밟아야 하지만 소송 비용에 비해 티켓값이 적어 사실상 표류 중이다. 2019년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에서 열린 '홀리데이랜드페스티벌2019' 역시 주최사인 페이크버진을 대상으로 집단 소송 움직임으로 번진 바 있다.
김작가 평론가는 "페스티벌 시장의 흥망성쇄는 지난 10년 간 사인 코사인 곡선과 같아왔다"며 "코로나 이후 2년 정도 스탑 기간을 거치면서 그 사이 쌓인 자본과 페스티벌의 수요가 최근의 우후죽순 현상을 다시 만들었다고 본다"고 짚었다.
또 "결론적으로는 페스티벌이 자리잡으려면 지속성 바탕으로 한 노하우의 축적이 있어야 한다"며 "하나의 문화 및 시스템으로 자리잡기 전에, 한탕을 노리는 기획사들을 경계해야 한다. 한국 페스티벌의 산업 경쟁력을 깎아내리는 결정적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