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이들 음악은 흐물거리며 뭉개지는 달리의 시계 같다. 무의식 내지는 꿈에서나 볼 법한 환상의 형상들, 사랑과 상실의 언어를 경쾌한 리듬과 비트로 빚어내는 초현실적 아이러니.
드럼과 신스, 기타 사운드는 말리부의 투명한 파도처럼 부서지며 파스텔톤으로 번진다.
지난 8일,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라이브'(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88잔디마당) 마지막 무대. 음악과 영상, 조명이 감각적으로 맞아 떨어지는 이들 공연을 보면서 생각했다.
다음날 오전, 서울 홍대 인근의 한 카페에서 만난 미국 밴드 레이니(LANY) 두 멤버, 폴 클라인(보컬, 기타, 건반)과 제이크 고스(드러머)는 '캘리포니아 해변 해질 무렵을 연상시킬 정도로, 음반 미장센이 통일성을 지니는 것 같다'는 본보 기자의 인상평에 "의도적으로 특정 풍경을 생각하고 음악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분위기가 통일됐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우리 모두 풍경이 특별히 아름답지 않은 미국 중부 출신이거든요. 음악을 시작하고 나서 서부, LA로 이사하고 나서야 아름다운 풍경에 영감을 조금씩 받았던 것 같습니다. 밴드 결성 초창기 때 그런 주변 풍경의 영향은 특히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폴 클라인)
9일 서울 홍대 인근 카페에서 만난 미국 밴드 레이니(LANY) 두 멤버, 폴 클라인(보컬, 기타, 건반)과 제이크 고스(드러머). 사진=유니버설뮤직코리아
LANY는 지난 2014년 전직 모델 출신의 폴과 키보디스트 레스 프리스트, 드러머 제이크가 뭉쳐 결성한 밴드다. 해외 투어를 돌면서 점차 성장했고, 초기부터 녹음과 믹싱, 마스터링을 도맡던 레스는 가정에 충실하기로 결정했다.
"레스의 결정을 지금도 존중하고, 그의 존재에 대해서는 감사한 마음이 여전히 큽니다. 2인조로 재편됐지만 음악의 본질이나 추구하는 바는 여전히 다르지 않습니다. 제이크는 전 세계 통틀어 제가 가장 좋아하는 드러머에요. 자기만의 독특한 연주 스타일을 갖고 있고, 우린 서로를 채워줍니다. 음악 만들 때는 서로 간 건설적인 비판에도 항상 열려있죠."(폴 클라인) "사랑과 존중이 기반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레이니'로서 좋아하는 음악을 만들고 있고, 같은 비전을 공유하고 있습니다."(제이크 고스)
밴드명 LANY는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와 뉴욕(New York)의 머리 글자를 따서 지은 단어. '미 전역을 사로 잡는 음악'을 하겠다는 포부를 새겼다.
"데뷔 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이 듣고 즐겨줄 수 있는 음악을 하는 것이 비전입니다.한편으로는 누구에게나, 우리 음악이 확신과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폴 클라인)
이들의 내한은 2019년 단독 공연 이후 약 3년 만. 2017년 '지산 밸리 록 뮤직 앤 아츠 페스티벌'을 시작으로 그간 한국을 5차례 방문했다.
이번 내한 때는 이들이 직접 디자인한 한국 한정 MD 상품들을 선보이고, 사인회도 갖는다. '한국식 손하트(엄지와 검지를 이용)'를 하며 윙크하는 태극기 문양의 귀여운 캐릭터가 심볼이다.
폴 클라인은 "둘 다 패션에 관심이 많아 데뷔 초부터 공연 대기실에서 직접 만든 티셔츠를 판매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음반 커버, 포스터, MD, 무대 위 화면까지 음악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재밌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전날 'I Love you so bad', 'Malibu Nights' 같은 대표곡들부터 최근 앨범 'GGBBXX' 수록된 'Dancing in the Kitchen', 'ex i never had' 같은 곡들이 나올 때마다 객석은 떼창과 핸드폰 불빛으로 넘실댔다.
9일 서울 홍대 인근 카페에서 만난 미국 밴드 레이니(LANY) 두 멤버, 폴 클라인(보컬, 기타, 건반)과 제이크 고스(드러머).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다만, 모델 같은 외모와 신스 기반의 대중적 팝 사운드가 음악성보다 부각되는 것에 대한 일각의 평가에 대해 폴은 "우리가 좀 더 못생겨지면 될까요"라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데뷔 초, '델 컴퓨터'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몇 개의 저가악기만 있는 상황에서 음악을 시작했어요. 장르를 물어볼 때마다 우린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늘 난감합니다. 단순히 팝 밴드라는 틀에 갇히기는 싫어요. 라이브 무대를 통해 탈피하고 싶습니다."(폴 클라인)
내년 발매할 음반도 투어를 돌며 계속해서 작업 중이다. '작곡-스튜디오-투어'의 과거 작업 방식은 지금 '작곡-투어-스튜디오-투어-스튜디오'로 바뀌어 있다. "내일 집으로 돌아가는데, 수욜부터 금요일까지 스튜디오에서 녹음 하고, 다음주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신곡을 다시 쓸 겁니다. 내년 발매될 음반에는 드럼과 기타 사운드가 조금 더 강조될 것 같아요."(폴 클라인)
이들이 2017년부터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K팝 시장도 급격한 성장세를 거쳤다. "최근 블랙핑크를 잠시 만난 적이 있다"는 폴은 "K팝 그룹들의 미국 그래미 시상식 무대를 지켜보며 전체적인 완성도에 크게 놀랐다. 언어적으로 알아들을 수 없지만 쏟아붓는 시간과 노력이 대단하다고 느꼈다"고 했다. 제이크 역시 "LA 소파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BTS의 공연을 봤다. 춤과 노래 모두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 대단했다"고 덧붙였다.
"BTS 제이홉도 우리 음악 듣고 있다고 했는데 만날 기회가 아직은 없었습니다. BTS, 블랙핑크 두 그룹 모두 워낙 큰 규모의 아티스트라서, 저희가 먼저 제안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협업 요청이 온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습니다."(폴 클라인)
한국식 하트를 배웠다고 선보인 이들은 "조만간 한국을 다시 찾겠다"며 웃어보였다.
"한국 팬들의 사랑은 말로 형용하기 힘들지만, 정말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다른 국가에 비해 남다른 표현 방식이 있어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음을 매 공연마다 느낍니다."(폴 클라인) " "이번 방문으로 가장 애정있는 국가가 될 것 같습니다."(제이크 고스)
9일 서울 홍대 인근 카페에서 만난 미국 밴드 레이니(LANY) 두 멤버, 폴 클라인(보컬, 기타, 건반)과 제이크 고스(드러머).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