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섬 제주에서 바티칸까지⑬)'포(Pho)'와 부대찌개

입력 : 2022-10-17 오후 4:38:39
우리는 같은 아시아에 속했지만 중국, 일본에 대해서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여타 아시아 국가들은 잘 모른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지만, 곧 잊혀졌다. 베트남을 말할 때 떠오르는 것이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소녀가 아오자이를 입고 야자수 잎을 엮어 만든 베트남 전통 모자 ‘논’을 쓴 모습이다. ‘미스 사이공’이란 뮤지컬의 포스터가 그러하다. 그러나 ‘미스 사이공’은 세계 4대 뮤지컬이라는 이야기는 들어 익히 알지만 뮤지컬을 본 사람도 많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담백한 베트남 국수와 보쌈을 좋아할 정도이다. 포(Pho)는 베트남의 우울한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음식이다. 베트남 전통 쌀국수에 프랑스 식민의 영향으로 소고기 고명을 얹혀서 베트남 북부 남딘에서 재탄생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30년이 걸렸다. 전쟁이 끝나자 보트피풀을 통해서 순식간에 세계로 확산되어 세계적인 음식이 되었다.
 
음식까지 그 나라의 기구한 역사와 사람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사실이 자못 흥미진진하다. 우리나라의 부대찌개의 역사와 얼마나 빼닮았는지! 탄생의 비밀이야 어찌되었건 둘 다 자국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는 음식이다.
 
베트남을 달리다보니 하루 두 끼는 이 포(Pho)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포가 세계적인 음식 반열에 들게 된 것은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 지난번 지나온 닌빈 부근에 남딘이라는 도시에 프랑스 식민시대에 당시 인도차이나에서 가장 큰 섬유공장이 세워지면서 전국의 수만 명의 노동자가 몰려들었고 그들이 가장 즐겨 먹던 음식이 쌀국수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쇠고기보다는 돼지고기와 어류로 단백질을 섭취해 왔다. 농경국가인 베트남에서 가장 소중한 재산이자 일꾼이요, 가족 같은 소를 먹는다는 것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세기 이후 프랑스 식민 시대의 남딘 섬유공장 부근에서부터 쇠고기가 가미된 쌀국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남딘 섬유공장의 관리로 파견 온 프랑스 인들이 쌀국수에 맛을 들이면서 하인인 베트남 주방장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쇠고기를 얹어 쌀국수를 만들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먹기 위해서는 도축을 할 수 없었지만 프랑스인들의 요구에 따라 쌀국수에 소고기 고명을 얹었더니 새로운 맛의 향연이 펼쳐졌던 것이다.
 
베트남어로 쌀국수를 '포(Pho)'라고 하는데, 이 말도 프랑스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기와 채소에 각종 향초와 후추 등 향신료를 섞어 만드는 진한 프랑스 야채수프인 '포토프(pot au feu)'가 '포'의 어원이라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세상이 뒤집어지자 남베트남의 반공 인사와 고위 간부들 그리고 중국 화교 위주의 부유층 등이 베트남을 탈출하게 되었다. 보트피플은 200만 명 정도 추정하는데 도중에 질병과 배고픔, 배의 전복과 해적들의 납치 등으로 100만 정도만 엑서더스에 성공해 세계 각국에서 이민 생활을 하고 있다.
 
포는 미국과 캐나다에 정착한 보트피플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쌀국수 식당을 개업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단숨에 단백한 쌀국수와 소고기 그리고 야채의 조합에 인스탄트 식품처럼 신속히게 먹을 수 있고 싼 가격에 열심히 살아가는 베트남 사람들의 깊은 인상을 주면서 금방 퍼져나갔다.
 
베트남 음식은 1000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아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100년 가까이 지배한 프랑스의 영향도 받았다. 아침이나 점심은 간단한 바게트 샌드위치와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마요네즈와 버터를 바르고 토마토, 양상추를 올려 먹던 프렌치 바게트 샌드위치가 당근, 계란, 간 고기, 두부 등 신선한 베트남 식재료와 만나 변형되어 탄생한 것이 반 미(banh mi)이다. 유래는 씁쓸하지만 맛은 일품이다. 베트남 사람들이 프랑스를 몰아냈지만 반 미까지 몰아내지는 않았다.
 
예로부터 쌀은 생명의 원천이고 고유의 정령을 가진 존재로 신성시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은 있어도 결코 배고픔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사람들이 각박하지 않다.
 
사마천의 사기에 초식열전 편에 “초와 월지역은 땅이 넓고 인구가 적으며 쌀로 밥을 해먹고 물고기로 국을 끊여 먹으며 불로 땅을 갈고 물로 김을 매는데 과일은 고동과 조개 위로 떨어지니 장사꾼을 기다리지 않아도 먹을 것이 족하다”고 했다. 이 월나라는 중국의 복건과 광동에 베트남 북부까지 포함한 나라였다. 우리가 아는 ‘오월동주’ 고사 속에 나오는 나라이다.
 
‘불이 땅을 갈고 물이 김을 맨다.’라는 말은 불을 놓아 화전을 하면 땅은 부드러워 쉽게 여자들도 농사를 짓고 논에 물을 대면 잡초는 물속에서 죽어 없어진다는 말이니 쉽게 농사지어 배불리 먹는 풍요로운 삶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베트남의 논과 밭에선 여자들의 모습 밖에 안 모인다. 남자들은 카페에 모여 수다를 떨거나 맥주를 마시고 있다.
 
길을 지나다 옆에 잔치가 벌어진 것 모양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왁자지껄 떠들썩하다. 한 사내가 나를 보고 이리오라고 소리를 지르니 다른 사람들이 보고 함께 부른다. 다른 문화에 대하여 잔뜩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내가 마다 할 이유가 없다. 다가가니 나를 부른 사내가 의자를 비우고 앉으라 한다. 다른 사람이 술잔을 손에 쥐어주더니 술을 따른다.
 
베트남의 장례는 가족의 경제력을 넘어서는 일종의 허례허식이라고 한다. 윤회 과정을 거쳐 환생을 하는데 이승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가족은 고품격의 장례 행위를 통해 환생자의 신분을 높여지기를 바람을 담는다. 산소에서 장례를 마치고는 다시 마을 주민들에게 감사의 잔치를 벌인다. 공동체가 함께 해준 덕분에 장례가 무사히 끝났고, 고인도 지금보다 더 좋은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감사하는 것이다. 49제는 고인을 모신 제단에 매일 향을 피우는 의식이다. 이것이 끝나면 다시 공동체의 협조로 모든 의례를 무사히 치렀음을 감사하는 잔치를 벌인다.
 
강명구 평화마라토너가 베트남에서의 평화달리기 14일차인 지난 14일 베트남의 한 마을 장례식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다. (사진=조헌정 목사)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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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