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섬 제주에서 바티칸까지⑪)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입력 : 2022-10-13 오후 1:38:10
지난 8일간 하루 35km씩 뛰고 오늘 쉴 핑계를 잡았다. 사실 이 핑계는 이 계획을 세울 때부터 마음먹은 첫 휴식일 이었다. 그러니까 베트남 국민들에게 무엇보다 소중했을 ‘자유와 독립’을 선사한 위대한 정치가요, 이웃집 아저씨 같은 분이 나고 자란  '호앙쭈' 마을을 찾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과 육신의 휴식을 함께 얻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 여정 중에 주요 일정으로 잡았다.
 
새벽에 천둥 번개가 몰아치고 엄청난 비가 쏟아 붓는 소리에 눈을 떴다. 오랜만에 알람을 안 켜고 잠을 푹 자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많지만 나이가 드니 잠만은 정말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뒹굴뒹굴하자니 옆방에서 조헌정 목사님 화상 예배 보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온다.
 
'응에안' 성의 성도 빈은 '하이퐁', '다낭'과 함께 북부 베트남의 주요 해안 도시이다. 이 도시는 남부지방으로 가는 관문 역할을 했기 때문에 북베트남의 전략요충지이다. 거기서 서쪽으로 20km 정도에 호찌민 생가가 있다. 그의 어렸을 때 이름은 '응우옌 신 꿍'이었다고 한다.  여느 독립운동가가 그렇듯이 그는 피신 다니느라 가명이 160여 개나 된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유학자였고 어머니는 서당 훈장 딸이었다. 그는 외갓집에서 태어나서 친가에서 자라다 아버지가 관직에 오른 해 어머니가 사망하자 다시 외갓집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부친은 프랑스 식민지 치하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응우엔 왕조'에서 관리로 산다는 것이 식민지 경영의 주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는 아버지의 친구 '부옹 툭 쿠이'로부터 유교 경전의 인본주의를 배웠다고 한다. 그는 새 스승으로부터 독립사상을 깨우쳤다. 국학을 다니던 그는 납세거부 시위에 참여해 퇴학을 당하고, 독립을 위해서는 세계를 더 알아야 한다는 용기 있는 생각을 하고 1911년 사이공에 있는 프랑스 해운회사에 견습 요리사로 취직하여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리고 영국,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떠돌면서 정원사·청소부·웨이터·화부(火夫) 등으로 일했다.
 
프랑스에서 활동할 당시 그를 밀착 감시하던 파리의 정보경찰 '장(Jean)'은 문서에 “호찌민은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들의 계획을 똑같이 따르고 있다”라고 기록했다. 이는 호찌민이 독립운동가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호찌민 어머니와 동생의 무덤을 먼저 찾았고, 이어서 호찌민 생가로 외갓집을 찾았다. 그리고 유년시절을 보낸 친가를 찾았다. 입구의 문 위에 간판에 글자가 있어 구글 번역기를 가져다 대니 호찌민의 유명한 말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였다. 그의 삶은 그렇게 소중한 것을 인민들에게 선사하기 위한 삶으로 점철된다. 그는 억압당한 베트남 인민의 자유와 독립,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어떻게 호찌민은  마르크스, 레닌의 이념을 베트남 인민들의 가슴속에 깊게 쏟아부울 수가 있었을까? 가혹한 제국주의 식민지 수탈에 맞설 이념으로 호찌민은 마르크스주의를 선택했지만 사실 그는 이념에 경도된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는 프랑스·일본·미국 등 당대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자들과 맞장 떠서 끝내 승리하고 자주독립을 이룩한 베트남의 영웅이지만 철저하게 자신이 신격화되는 것을 거부한 사람이다. 그는 권위적이지도 권력을 탐하지도 행사하지도 않았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란 호칭을 거부했다. 베트남 인민들은 그를 단지 ‘호 아저씨’라고 부를 뿐이었다.
 
그는 항상 사파리 정글모자에 남루한 옷 한 벌과 타이어를 오려서 만든 슬리퍼 차림의 인민들 속으로 달려가서 스킨십을 나누었고, 서정 시인처럼 은은하면서도 한낮의 더위를 식혀주는 스콜처럼 촉촉하게 베트남 인민들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는 피 뛰기는 전쟁과 증오의 현장 속에서도 인민들에게 명랑하고 행복한 모습을 보이려 부단히 애썼다. 무엇보다도 지도자가 낙담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기에 슬퍼도 울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도 무명용사들의 무덤을 찾을 때는 흐르는 눈물을 감울 수가 없었다.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 몬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정의감과 애국심에 불타오르도록 때론 열정적인 웅변가처럼 때론 음유시인처럼 달콤하게 연설하였다. 젊은이들은 그의 연설에 감동하여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폭탄이 떨어지는 전쟁터로 나가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사람은 입체적이고 다면적이다. 그 어떤 위대한 인물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9월 2일, 베트남의 완전한 통일을 못 본 채 숨을 거둔다. 베트남 정부는 이런 그를 기리기 위해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을 ‘호찌민’시로 바꾼다.
 
유해를 화장해 평생을 노심초사 사랑을 불태우던 불멸의 연인인 조국 베트남 북부와 남부, 중부에 고루 나누어 뿌려달라고 했던 호찌민이었다. 베트남 공산당 지도부는 “내가 죽은 다음 거창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호찌민의 유지를 무시했다. 호찌민은 죽었어도 베트남 남북의 인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이는 하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굴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의를 달아나게 만들었다’는 말처럼 죽은 호찌민은 거대한 제국 미국이 꽁무니가 빠지게 달아나게 만들었다.
 
“당시 조국은 분단되어 싸우고 있었지. 호 아저씨는 언제나 우리 항쟁의 구심점이었어. 호 주석은 죽기 전에 남부에 한번 가는 것이 소원이었고, 남부의 인민들도 생전에 호 주석을 한번 보는 것이 평생소원이었어. 그때는 호 아저씨의 유해를 기념관에 보존하는 것이 인민의 이익을 위한 조치라고 믿었지” 영화 ‘호 아저씨의 마지막 순간’을 만든 빈 감독의 해명이다.
 
평생을 ‘조국과 혁명’을 위해 헌신했고, 죽어서도 ‘인민’을 위해 그만큼 ‘봉사’했으면 이제 그만 그의 육신도 놓아주어 그의 유언대로 그의 평생의 불멸의 여인 베트남 남쪽·북쪽·중부에 화장하여 골고루 뿌려 그의 영혼도 쉬게 해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호찌민은 베트남인들에게 자랑스러운 ‘조국’의 대명사이다. 베트남인들은 호찌민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뭉칠 수 있었고, 힘을 얻어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강명구 평화마라토너가 평화달리기 10일차인 지난 10일 베트남 응에안 성에 있는 호찌민의 어머니 묘를 방문하고 있다. (사진=강명구 평화마라토너)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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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