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29일 문재인 전 대통령이 경남 양산시 하북면 평산마을을 찾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 등 당 지도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민주당 제공, 뉴시스 사진)
[뉴스토마토 박주용 기자] 문재인 전 대통령이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과 관련한 현 정부의 압박에 격노하며 진작부터 강경 기조의 대응 메시지를 내려 했지만, 주변 인사들의 반대로 무산된 것으로 전해졌다.
5일 복수의 여권 인사들에 따르면, 문 전 대통령은 지난 7월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 관련해 검찰이 국가정보원을 압수수색하는 등 전임 정부의 월북몰이, 월북조작으로 규정하고 나서자 매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간 문 전 대통령은 정권교체 이후 서해 피격 사건이 재조명되며 문재인정부 인사들로 수사망이 좁혀지는 과정에서도 공개적인 입장 표명을 삼갔다.
이 같은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이날 <뉴스토마토>와의 통화에서 "지난 7월에 (검찰이)국정원 압수수색 들어갈 때 문 전 대통령이 '내가 직접 메시지를 내겠다'고 그랬는데, 주변 측근들이 만류했다"며 "(지난 10월 검찰이)서욱 전 국방부 장관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할 때도 (문 전 대통령이)입장 내겠다고 했는데 그때도 그냥 넘어갔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문 전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메시지를 내고 전면에 나서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만류한 것"이라며 "그러다가 이번에 (서훈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구속영장 청구 이후)처음 (공개 메시지가)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관계자는 그러면서 "진작 문 전 대통령의 입장이 나왔다면 사태가 이처럼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친노로 출발해 친문계로 분류됐던 김종민 민주당 의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고 했다. 김 의원은 당시 문 전 대통령의 공개 메시지를 만류한 주변 인사들에 대해 문재인정부 청와대 출신 국회의원 등 이른바 친문 핵심 참모들로 봤다. 다만, 문 전 대통령의 복심으로 대내외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는 윤건영 민주당 의원은 "사실과 다르다"며 부인했다.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과 관련한 문 전 대통령의 공개 메시지가 처음 나온 건 지난 10월 감사원의 서면조사 통보 직후였다. 윤건영 의원은 10월3일 기자회견에서 문 전 대통령이 감사원의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과 관련한 서면조사 통보에 대해 "대단히 무례한 짓"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평소 문 전 대통령의 점잖은 어법을 감안하면 매우 격앙돼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또 다른 최측근인 전해철 의원에 따르면, 문 전 대통령은 감사원의 행태에 대해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문 전 대통령은 불과 며칠 뒤인 10월18일 문재인정부 인사였던 서욱 전 국방부 장관과 김홍희 전 해양경찰청장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 때에도 직접 입장 표명을 하려 했지만, 측근들의 만류로 무산된 것으로 전해졌다.
서훈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지난 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그러다 지난 1일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를 계기로, 공개적으로 자신 명의의 입장문을 냈다. 문 전 대통령은 윤건영 의원을 통해 낸 입장문에서 "서해 사건은 당시 대통령이 국방부, 해경, 국정원 등의 보고를 직접 듣고 그 보고를 최종 승인한 것"이라며 "대통령은 이른바 특수정보(SI)까지 직접 살펴본 후 그 판단을 수용했다"고 밝혔다. 당시 '월북 판단'의 최종 주체는 문 전 대통령 자신이었음을 분명히 하면서, 피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문 전 대통령은 그러면서 "정권이 바뀌자 대통령에게 보고되고 언론에 공포되었던 부처의 판단이 번복되었다. 판단의 근거가 된 정보와 정황은 달라진 것이 전혀 없는데 결론만 정반대가 되었다"며 "부디 도를 넘지 않기를 바란다"고 경고했다.
문 전 대통령은 지난 3일 서훈 전 실장이 구속되자 다음날인 4일 페이스북을 통해 다시 한 번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했다. 문 전 대통령은 "남북 간에도 한미 간에도 최고의 협상전략은 신뢰다. 신뢰가 한 번 무너지면 더욱 힘이 든다"며 "서훈처럼 오랜 연륜과 경험을 갖춘 신뢰의 자산은 다시 찾기 어렵다. 그런 자산을 꺾어버리다니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라고 밝혔다.
현 정부를 향한 문 전 대통령의 격앙된 표현이 처음으로 페이스북에 담긴 것은 지난달 9일 '풍산개 반납 논란' 때였다. 당시 문 전 대통령은 "우리는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이처럼 작은 문제조차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흙탕물 정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인지, 이 어려운 시기에 그렇게 해서 무얼 얻고자 하는 것인지 재주가 놀랍기만 하다"며 "이제 그만들 하자. 내게 입양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현 정부가 책임지고 반려동물답게 잘 양육관리하면 될 일"이라고 했다.
민주당 인사들은 문 전 대통령이 입장 표명을 통해 이례적인 어법까지 써가며 자신의 불쾌한 심경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에 대해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문 전 대통령의 가세로 여야 대치는 신구 권력 정면충돌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박주용 기자 rukaoa@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