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요일 오후에 공연을 보기 위해 광화문에 갔다. 공사를 끝내고 새 모습을 드러낸 광화문 광장은 휴일 오후 분위기에 걸맞게 한가롭고 고요했다. 잘만 운영하면 시민들의 쾌적한 여가와 문화생활을 위한 명소가 될 것 같은 기대가 생겨났다. 광화문 광장을 걸으면서 그런 한가로운 생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일요일이라 주변에서 집회와 시위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던 것 같다.
서울 세종로 일대에서는 주말이면 각종 집회들이 열리곤 한다. 진보 진영에서는 ‘윤석열 퇴진-김건희 특검’을 내건 집회가 수개월째 토요일마다 열리고 있다. 이에 맞서 전광훈 목사 등이 주도하는 보수단체들의 맞불 집회가 ‘문재인-이재명 구속’을 요구하며 역시 토요일마다 경쟁적으로 개최된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의 집회도 주말에 자주 열리곤 한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던 삼각지, 대통령실이 있는 용산 일대에서도 크고 작은 집회들이 계속된다.
이러다 보니 서울 도심 곳곳에서는 주말이면 교통체증으로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 민주냐 독재냐를 결판내야 했던 시절이었다면 그런 불편쯤이야 감수하는 것이 시민들의 자세였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선과 악 사이에서 사생결단을 내야 할 시절을 우리가 살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더구나 집회의 대부분은 약자들의 절박한 생존권 때문도 아니고, 정치에 목맨 사람들의 습관적인 집회들이기에 보통의 시민들이 온갖 불편을 인내해야 할 이유를 찾기도 어렵다.
이런 얘기를 하는 필자 또한 평생 각종 집회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시민의 한 사람이었다. 그 시절 머릿속에 우선했던 것은 ‘집회와 시위의 자유’에 대한 신념이었다. 천부적 권리인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다른 무엇에 우선해서 보장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광장’을 바라보는 생각들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누가 이기고 지냐 하는 것에 우리의 행복이 좌우되지 않더라는, 그러니 누가 이기고 지냐 하는 것이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더라는 세월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정권의 ‘퇴진’과 ‘수호’의 대결이 시민들의 일상을 흔들어 놓아도 될 만큼 절박한 문제이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생각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갈등은 필연적이고 각자의 요구는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요구에 결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투쟁들과는 무관하게 각자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도 존중받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요즘 서울 도심의 차로를 점거하며 집회를 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주최 측의 부풀려진 주장과는 달리, 많아야 수만 명이었고 근래에는 수천 명을 넘지 못한다. 4500만명에 달하는 유권자들 숫자에 비하면 아무런 대표성을 갖지 못하는 참여자들이다. 대부분이 각 진영의 극단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주말마다 서울 도심을 차지할 권리가 부여되고 뉴스거리가 되는 것은 과잉 대표화된 결과다. 그 공간을 향유할 권리를 마찬가지로 갖고 있는 대다수 시민들에게는, 어째서 자신들이 이런 소음과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지를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된다.
집회와 시위의 허가 여부를 둘러싼 갈등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근래에는 경찰이 금지했던 집회·시위를 법원이 뒤집어 ‘부활’시키는 경우가 많이 생겨나기도 한다. 법원의 판결도 그런 취지라고 짐작되지만, 민주주의를 하는 사회에서 자유를 규제하는 일은 대단히 신중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소음이 되어버린 구호를 원하지 않는 시민들의 생각도 존중되는 가운데 조화롭게 내려질 필요 또한 있다. 보통의 시민들에게는 하나도 절박하지 않은 ‘퇴진’과 ‘수호’의 외침을 주말마다 시민들이 불편을 감수하고 인내해야 하는 상황은 상식적이지 않다. 과잉 정치화된 일부 집단들에 의해 시민들의 거리와 공간이 무한정 독차지 되는 것은 민주주의의 지향에도 부합되지 않는다.
차가운 겨울이지만 서울의 길을 오랜 시간 걸었다. 연세대에서 출발하여 안산을 거쳐 인왕산에 올랐다가 삼청동과 경복궁을 거쳐 인사동까지 몇 시간을 걸었다. 참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길이었다. 이렇게 걸을 수 있는 좋은 길이 우리 가까이 있음이 고마웠다. 서울 길의 그런 고즈넉함이 깨지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절로 생겨났다.
정권을 하루빨리 퇴진시켜야 나라를 구할 수 있는데 이 무슨 한가로운 소리냐고 화낼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정반대로, 좌파들의 선동을 막고 체제를 수호해야 하는데 지켜만 보란 말이냐고 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함께 모여서 외칠 자유를 요구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는 광장은 ‘시민들이 함께 걸어나가는 거리’(리베카 솔닛)가 아니다. 그들이 모여있는 거리의 건너편에는 마찬가지로 존중받아야 할 또 다른 자유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음이 되어버린 구호들을 듣고 싶지 않은 자유도 보장되어야 한다. 그것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새로운 윤리가 돼야 한다고 믿는다.
유창선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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