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11일 오전 대구 아트파크에서 열린 대구·경북 언론인 모임 '아시아포럼21' 초청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유승민 전 의원의 당권 도전 여부를 놓고 국민의힘 내에서조차 설왕설래가 오갑니다. 대체 무엇을 망설이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의 우려대로 이번 전당대회는 '윤심의, 윤심에 의한, 윤심을 위한' 장입니다. 민심을 배제하는 당심 100%로의 룰 개정은 예고편에 불과했습니다. 정녕 이를 몰랐다는 말입니까.
패기 하나로 대통령과 맞장을 뜨던 젊고 당돌한 이준석 전 대표가 축출됐습니다. 나경원 전 의원이 언제부터 '비윤'으로 분류됐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권력만을 좇던 당내 대표적 주류 바라기 아니었던가요? 대통령 취임식에조차 초대받지 못해 서운함을 드러냈던 건 일종의 전조이자 복선이었습니다. 김기현 의원은 '계파에 줄 선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가 당심 1위로 치고 올라간 배경은 누가 뭐라 해도 '윤심'의 든든한 지원에 있습니다. 2선으로 물러나겠다던 원조 윤핵관 장제원 의원도 다시 기세등등하게 등장했습니다. 사실, 조폭도 이러지는 않을 겁니다. 쇄신을 말해야 할 초선 의원들이 우르르 몰려가 집단 린치를 가하며 스스로의 공천에 목을 매는 순간 국민의힘은 한낱 이해집단으로 전락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을지도 모를 일이죠. 사사건건 대들던 이준석 전 대표에 대한 본심은 '내부총질' 문자로 들통이 났습니다.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준석은 내쳐졌고 당은 윤심이 장악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윤심에 대항할 자는 없어 보입니다. 나경원 전 의원도 고개를 숙였고, 안철수 의원은 '공동정부'라는 꿈에 여전히 갇혀 있습니다.
총선 승리는 염두에도 없어 보입니다. 전국적 지명도가 약한, 특히 수도권과 2030세대에 소구력이 없는 김기현 의원을 당대표로 내세운 데는 특유의 윤 대통령 용인술이 작용한 듯 보입니다. 윤 대통령은 힘 있는 2인자를 달가워하지 않기로 유명합니다. 책임총리를 대신해 신문총리를 내세웠고, 대통령실 비서실장도 존재감이 약한 김대기 실장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연장선에서 집권여당 대표도 자신의 말을 충실히 따를 인물이 최우선으로 고려됐을 것입니다. 권성동 의원이 당대표 직무대행 시절 "대통령님의 뜻을 잘 받들어 당정이 하나 되는 모습을 보이겠습니다"라고 충성 맹세를 하자, '체리따봉' 문자로 화답한 게 떠오릅니다.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이 29일 서울시 마포구 홍대 앞 안 카페에서 열린 '김기현과 함께 새로운 미래' - 타운홀 미팅에 참석해 자리에 앉아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런 상황에서 유승민 전 의원이 전당대회 출마 여부를 놓고 원점에서 다시 검토를 하는 듯합니다. 근래 들어 말수도 극히 줄어들었습니다. 당대표 당선 가능성이야 희박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대로 개혁보수의 희망 하나 쯤은 남겨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민심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유승민 전 의원이 당내 컷오프마저 통과하지 못할 경우, 이는 유승민의 굴욕이 아닙니다. 오히려 국민의힘 쇠락을 재촉하는 촉매제가 될 것입니다. 윤심을 충실히 이행하는 당대표가 선출되더라도 국회의원 속성상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출렁인다면 그 어떤 혼란이 닥칠지 알 수 없습니다. 윤 대통령에 대한 탈당 요구나 분당 조짐도 배제하지 못합니다. 유승민 전 의원은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쳐야 합니다.
유승민 전 의원은 위기 때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당의 주인이 당원이라지만, 민심과 동떨어진 당은 그 생명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하물며 지금의 당심은 '윤심'을 따르는 115명의 난장이들이 만들어낸 신기루에 불과합니다. 2015년 4월8일 당시 집권여당이던 새누리당 원내대표로 국회 본회의장에 섰던 유승민 전 의원은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말로 자신의 소신을 지켰습니다. '진영을 넘어 미래를 위한 합의의 정치'로 진행된 연설은 야당으로부터도 대한민국 보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극찬을 받았지만, 박근혜 청와대에게는 배신자의 말장난일 뿐이었습니다. 혹시 그로 인한 배신자 낙인이 지금의 출마를 망설이게 하는 요인인지 궁금합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대선 경선과정에서 TK에 머물며 배신자 프레임과 싸운 것이 경선 패배의 결정적 이유였습니다. 대구·경북에서 60대 이상 당원들과 박근혜 탄핵의 불가피성을 얘기해봤자, 배신자가 아니라고 하소연해봤자 오해와 갈등만 깊어질 뿐이었습니다. 늪이란 본디 헤어나려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법입니다. 오히려 과감히 TK를 벗어나 중원에서, 수도권에서 바람을 일으켜야 했습니다. 민심과 괴리된 당이 생존하지 못하듯, 전국적 민심과 동떨어진 지역 민심 또한 존재치 못합니다. 이제 유승민 전 의원이 결단할 시간입니다. 그를 향했던 민심마저 저버리지 않길 기대할 뿐입니다.
2022년 4월22일, 국민의힘 경기지사 경선에서 졌던 유승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객의 칼에 맞았지만, 장수가 전쟁터에서 쓰러진 건 영광입니다. 달은 차면 기우는 법, 권력의 칼춤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갑니다."
원칙 있는 패배가 결국 원칙 없는 승리를 꺾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우리 정치에 준 교훈이었습니다.
편집국장 김기성 kisung0123@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