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도의 밴드유랑)시가렛 애프터 섹스 '음악은 미장센'

흑백의 아련한 로맨스…드라마틱한 곡 서사와 조명·영상 미학
KBS아레나서 단독 공연…3800여 관객 동원

입력 : 2023-02-08 오후 5:54:14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마빈 게이의 'After The Dance', 스티브 로런스의 'Pretty Blue Eyes', 파리 시스터스의 'A Lonely Girl's Prayer', 플릿 우즈의 'Tragedy'....
 
흥겨운 고전 팝이 메아리처럼 들려올 때부터 직감한 누아르(noir) 풍. 이내 서서히 무채색으로 물드는 공연장.
 
'음악에 있어 미장센이란?' 지난 5일 서울 강서구 KBS아레나(3800여명 관객 동원)에서 열린 미국 밴드 시가렛 애프터 섹스의 단독 공연을 보는 내내 이 질문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관능의 세계, 타오르는 감각 끝 닿는 나른한 허함, 에스프레소처럼 진한 사랑의 밀어와 지나간 인연의 신기루 같은 잔상들... 이 슬로우 모션처럼 흘러가는 멜랑콜리한 선율에 맞춰 일렁이는 암전과 눈부신 백색조명의 세례들.
 
지난 5일 서울 강서구 KBS아레나(3800여명 관객 동원)에서 열린 미국 밴드 시가렛 애프터 섹스의 단독 공연.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시가레츠 애프터 섹스는 2008년 미국 텍사스에서 결성된 밴드입니다. 그렉 곤잘레스를 주축으로 중성적 허스키 목소리와 부드러운 멜로디가 특징. 1980년대 중후반 그룹 매지 스타 같은 드림 팝(기타의 이펙터 잔향 효과로 꿈 꾸듯 몽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장르) 계열의 듣기 편한 사운드. 여기에 공간을 텅 비우는 미니멀리즘적 소리 풍경을 더해 우울하고 몽환적인 이들 만의 정서를 극화합니다.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 'Cigarettes After Sex(2017)'와 정규 2집 'Cry(2019)'를 통해 고유의 인장 같은 사운드를 창조해냈습니다. 최근 국내에서도 MZ세대들 중심으로 인기인 LP열풍에 무채색 커버를 두른 이들 음반은 늘 최전선에 있습니다.
 
이날 공연은 음반 만큼 영화적. 흑백의 아련한 로맨스에 가까웠습니다. 
 
곤잘레스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사랑과 이별, 섹슈얼리티가 처연하고 부드러운 모노톤 사운드에 박제되는 식. 몽글몽글한 기타 소리와 느리지만 일정한 간격의 탐, 슬프게 우는 듯한 심벌, 기쁨과 슬픔 양극의 감정선을 오가는 와중 느슨한 곤잘레스의 목소리... 첫곡 ‘Crush’를 필두로 펼쳐보인 15곡은 동일한 톤으로 사운드를 정교히 디자인한 '더블 앨범'처럼 들렸습니다.
 
지난 5일 서울 강서구 KBS아레나(3800여명 관객 동원)에서 열린 미국 밴드 시가렛 애프터 섹스의 단독 공연.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발표 시기가 제 각각인 곡들의 순서를 짜맞춰 드라마틱한 서사도 연출했습니다. 
 
무대 뒤 스크린 영상에 보름달을 쏘아올리며 '너는 내가 원하는 전부'(You’re All I Want·2020)라 읊조리다, 상처와 울음('Cry'·2019)에 닿을 때 암전 상태로 전환되는 식. 모노톤으로 잔잔한 파도가 들이치고('Heavenly'), 눈발이 날리는('K') 영상미학이 이들의 대표곡들과 화학작용을 일으킬 때, 객석에서는 박수와 함께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초반부 'John Wayne' 때, 스피커에 기타 하울링이 생기며, 사운드가 간혹 뭉개지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밸런스를 잡아갔습니다. 방탄소년단(BTS) 지민이 즐겨 들어 화제가 된 '스위트(Sweet)' 때는 도입부가 나오자마자, 관중들이 핸드폰을 일제히 드는 장관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공연의 최대 백미이자 대전환의 순간은 흑백으로 일관하다, 미러볼을 터뜨려 백색 빛의 향연을 만들어 낸 'Apocalypse'. 이어진 앙코르 무대 'Opera House'에서는 관중들이 핸드폰 불빛으로 화답하며, 공연장을 우주로 만들어냈습니다.
 
지난 5일 서울 강서구 KBS아레나(3800여명 관객 동원)에서 열린 미국 밴드 시가렛 애프터 섹스의 단독 공연.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록은 이처럼 사색과 관능의 음악일 수 있다는 것. 수중에서 듣는 듯한 몽롱한 기타, 베이스, 드럼의 조화가 ‘그대’라는 기억 버튼을 누르게 하는 것. 둔탁하고 느릿하게, 인연의 시작과 끝에서 연신 흘러가고 부유하며. 
 
그날 유독, 공연장 앞 유독 담배 연기가 짙었습니다. 한 관객이 친구에게 건네는 음성이 사부작 들려옵니다. 
 
"그 있잖아.. 프랑스 되게 작은 마을, 어디 어두운 골목 다녀온 느낌이지 않았어?" 
 
시가렛 애프터 섹스. 사진/(c) Ebru Yildiz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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