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피아노에서 쏟아지는 연속적인 음의 수평선들은 흡사 거대한 물줄기. 일렁이며 깊이 침잠(沈潛).
"피아노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죠. 그 어떤 악기보다 크고 긴 울림을, 가장 낮은 음부터 높은 음, 가장 약한 음부터 강한 음을 내는 악기죠. 가장 내밀하고, 겸손하고, 진중하고 무거운 완성형의 악기라는 생각도 듭니다."
24일 오전 11시 경 서울 종로구 JCC아트센터에서 열린 정재일의 새 음반 '리슨(LISTEN)' 기자간담회.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의 OST로 세계적 음악가로 우뚝 선 그는 "피아노는 사실 저의 모국어나 다름 없는 악기"라며 "말하는 것보다 편할 정도로 저와 가장 닮아있는 목소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수중처럼 깊숙히 가라앉는 피아노의 선형 연주, 필요 시 이를 받쳐주는 오케스트라 소리로만 신작을 제작한 이유라고.
24일 오전 11시 경 서울 종로구 JCC아트센터에서 열린 정재일의 새 음반 '리슨(LISTEN)' 기자간담회. 붉으락푸르락한 밤바다 정경을 박아놓은 앨범 표지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기생충', '오징어게임'의 영화감독 정재일. 사진=유니버설뮤직코리아
앨범 표지에는 왜 붉으락푸르락한 밤바다 정경을 박아 놓았을까. 앨범을 여는 첫 곡 'The River'와의 관련성은.
"제가 사는 곳은 한강 하구 시골 마을인데요. 조수 간만 차가 심해 바다물이 이렇게도 흘렀다가 저렇게도 흐르곤 합니다. 새들도 이렇게 갔다가 저렇게 갔다가 하고. 여기서 사람이 만들어놓은 자동차와 고층빌딩 같은 것만 지운다면, 너무 아름답겠구나. 그런 침잠의 음악을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총 7개의 곡이 수록된 음반은 파편적인 피아노 선율만 잔잔하게 흐르다, 중후반부 땐 오케스트라 선율들의 융합으로 사운드 스케일이 커집니다. 서로 반대되는 의미의 단어지만 원래는 한 곡이었다는 '에네스띠시아(Anesthesia)'와 '에스띠시아(Esthesia)'는 감정의 곡선을 교차하다 끝내 비등점까지 찍고 마는 곡들.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태를 뜻하는 게 '에스띠시아'라면, 그 반대의 '에네스띠시아'는 추함이 아니라 마비입니다.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느낄 수 없는 것. 동양철학에서도 씨앗을 뜻하는 '행인(杏仁)'의 반대는 몸이 마비되는 '불인(不仁)'이죠. 항상 열려있는 마음으로 살아보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첫 앨범을 통속적이고 단순하지만, 리슨이라 하기로 한 이유입니다."
"다른 예술가들의 보필을 위해 늘 듣는 사람이었다"는 그는 "이번 음반 만큼은 '내 안에서 뭐라하는지' 들어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제 마음의 소리 뿐 아닌, 사람들이 하는 말도, 지구가 하는 말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못들었기 때문에 팬데믹도, 전쟁도 겪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거든요. 이런 편린들과 감상들이 쌓이고 쌓여 퇴적되면 '산'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밴드 ‘긱스’ 출신에 박효신 '야생화' 등 대중음악 작곡, 타악그룹 '푸리', 소리꾼 한승석과의 작업, 국립창극단 작품 ‘트로이의 여인들’ 음악감독, 영화 OST... 1990년대부터 재즈, 국악, 인디음악 등 국악과 양악을 아우르고 어릴 적부터 10여가지 악기를 다뤄온 그가 데카(Decca·유니버설 산하 세계적 클래식 레이블)에서 내는 앨범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데카는 클래식 명가이지만, 60년대 '전설의 밴드' 비틀스를 떨어뜨린 세기의 오디션으로 유명한 일화가 있는 곳이기도.
24일 오전 11시 경 서울 종로구 JCC아트센터에서 열린 정재일의 새 음반 '리슨(LISTEN)' 기자간담회. '기생충', '오징어게임'의 영화감독으로 참여했던 정재일. 사진=유니버설뮤직코리아
한국 대중음악의 여러 경계를 허물어 온 그는 “이번 음반에서도 한국의 전통적인 접근법을 쓴 곡들이 몇개 있지만,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중심으로 하고 싶었다”며 "다음 앨범부터는 국악과 일렉트로닉을 활용한 접근법도 많이 활용해보려 한다"고 했습니다.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으로 세계적인 음악가로 알려졌지만 '기생충이 음악인생에 어떤 변곡점이 된 것 같나' 물은 본보 기자 질문에는 "무대 뒤에서 25~26년 간 일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스스로를 낮춥니다. “비단 음악뿐 아니라 예술은 수많은 노동 중 하나입니다. 예술가들에게 근면할 수 있는 책임감도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일단 제 마음을 기록을 해봤고요. 이걸 바탕으로 또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학습하고 구상하고, 앞으로 스텝을 밟아 나가고 싶습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