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러일전쟁은 식민지 지배 아래에 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습니다
. 일본에서는 전후 태어난 세대가 이제 인구의 8할을 넘고 있습니다. 그 전쟁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우리의 자녀나 손자, 그리고 그 뒤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과를 계속할 숙명을 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2015년 8월 14일, 당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전후 70년 담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벌인 제국주의 전쟁을 아시아, 아프리카 피식민지인들에게 희망을 준 사건이라 강변하고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의 구호였던 ‘대동아 공영권’의 다른 표현입니다.
또 전후 세대가 인구의 80%가 넘었다며 그들에게까지 사죄의 부담을 지워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일본이 전 세계에 저지른 만행을 이제 그만 덮자는 겁니다. 그는 5년 뒤인 2020년에는 이 대목과 관련해 “(과거사 문제에 대해) 그것으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대못까지 박았습니다.
독일과 비교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2015년 1월 당시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70년 연설에서 "나치 만행을 되새겨 기억하는 것은 독일인의 항구적 책임"이라고 했고, 같은 해 5월 2차 대전 종전 기념 메시지에서도 "역사에 마침표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해 7월 독일 법원은 2차 세계대전 기간 아우슈비츠 30만 학살 방조 혐의로 기소된 나치 친위대원(SS) 오스카어 그뢰닝에게 징역 4년형을 선고했습니다. 94세 고령자였음에도 가차 없이 단죄한 것입니다.
독일은 유치원에서부터 체계적으로 홀로코스트를 교육합니다. 그래서 일부 극우주의자를 빼고는 ‘히틀러 독일’ 시대에 대한 독일 사회의 총의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빌리 브란트가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 꿇고 한 사죄가 세계인들의 인정을 받은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일본은 2001년 이후 중·고교 역사교과서에서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술을 아예 빼버리거나 일본군의 관여와 강제성을 불명확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 외무성도 홈페이지에 위안부가 강제로 연행된 것이 아니라고 써놨습니다.
기시다 내각은 아베 3기 정부
일본의 기시다 내각은 사실상 아베 3기 정부라 할 만합니다. 2021년 9월 아베파의 지원으로 총리가 됐고 현 내각에도 아베파 인물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습니다. 아베 총리가 헌법 해석 변경으로 일본이 전수방위 원칙을 깨고 ‘전쟁 가능 국가’로 가는 문을 활짝 열었고, 기시다 총리가 3대 안보문서 개정으로 이를 마무리했습니다.
기시다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정부 간 협상 중임에도 아랑곳없이 역시 일제하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인 니가타현의‘사도광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신청서를 지난 1월 유네스코(UNESCO)에 다시 제출했습니다. 지난해 2월 국제적인 비판을 무릅쓰고 처음 신청서를 냈으나, 유네스코가 서류 미비를 이유로 심사작업을 하지 않아 무산됐음에도 재도전한 것입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사진=뉴시스)
윤석열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됐다”고 했습니다. 이어 “특히”라고 강조하면서 “복합 위기와 심각한 북핵 위협 등 안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미일 3자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도 했습니다.
‘과거사 청산’흐름을 청산하고 있는 현재의 일본에 면죄부를 주고, 북한 핵 등등 복합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핵심파트너라는 위상을 부여해 준 것입니다. 그것도 다른 날도 아닌 3·1절에 말입니다. 더욱이 3·1절 기념사는 8·15 경축사와 함께 국제적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가장 비중높은 대외 메시지를 발표하는 무대로 인식돼있는 자리입니다.
이 정도면, 윤석열정부가 일본과 동맹 관계를 맺으려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게 합니다.
“日정부, 피고기업은 징용보상에 참여하지 않기로 내부결론”
윤 대통령의 ‘파트너 일본’ 발언이,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기시다 정부의 호응을 끌어내기 위한 것임은 3척 동자도 알 만합니다. 그런데 일본이 잘못한 문제를 놓고 왜 우리가 이렇게 애걸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까? 겨우 ‘김대중·오부치선언’계승으로 일본 정부 사과를 대신하겠다며, 그것마저도 대단한 선물인 듯 생색내는 기시다정부에 말입니다.
윤 대통령의 노력이 성과를 내기는 하는 것일까요?
<조선일보>는 도쿄특파원이 쓴 지난 2일 자 “日정부, 피고기업은 징용보상에 참여하지 않기로 내부결론” 기사에서 “징용 문제에 정통한 한일관계자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은 최근 피고 기업의 재단기부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정했다”며 “이후 한국 정부가 피고 기업의 자회사를 통한 기부를 타진했지만 그것도 수용하지 않기로 내부적으로 결론 낸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습니다. “일본의 피고 기업이 어떤 형태로든 재단에 돈을 갹출하면 한국 대법원 판결을 인정,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이 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겁니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 기자 hb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