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극장 배경 'P의 거짓', 벨 에포크의 빛과 그림자 담아

(이범종의 게임 읽기)'P의 거짓'④영광과 어둠 함께한 시대, 벨 에포크
게임 속 '마녀의 탑과 공주' 배너는 무하 스타일
사라 베르나르 출연 '지스몽다' 포스터로 명성
같은 시대 드레퓌스 사건 등 어두운 사회상도
예술과 기술 부흥 이면의 상처, P가 치유할 차례

입력 : 2023-09-20 오전 6:00:00
[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서울 한복판에 100년 전 파리로 가는 타임머신이 들어섰습니다. 지난 17일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에선 '알폰스 무하 이모션 인 서울' 전시회가 한창이었습니다. 관람객들은 아르누보(새로운 미술)의 대가로 불리는 무하의 포스터를 감상하며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라는 뜻, 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 발발 전인 20세기 초의 기간)' 파리 시내를 걸었습니다. 관람을 마친 사람들은 무하의 도록과 포스터 사본을 고르며 여운을 즐겼습니다.
 
전시회장 밖에서도 벨 에포크 시대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19일 출시됐습니다. 네오위즈(095660) 산하 라운드8 스튜디오가 만든 다크 판타지 액션 롤 플레잉 게임 'P의 거짓'입니다. 라운드8 스튜디오는 이탈리아 동화 '피노키오'를 이 시대로 옮겨와 성인용 잔혹극으로 꾸몄는데요. 예술·산업 부흥의 어두운 이면을 가진 벨 에포크가 이 작품에선 어떻게 그려졌는지, 게임 속 무하의 그림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0월30일까지 서울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에서 진행되는 '알폰스 무하 이모션 인 서울' 전시회에서 만나 볼 수 있는 무하가 그린 자전거 광고(왼쪽)와 샴페인 광고 포스터. (사진=알폰스 무하 이모션 인 서울 예매 사이트)
 
에펠탑과 문화 융성의 시대
 
무하의 그림을 보기에 앞서, 그가 살았던 벨 에포크의 시작을 돌아보겠습니다. 1871년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항복했습니다. 그 해 3월 민중 봉기가 일어났고, 파리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정부 '코뮌'을 세워 시청을 장악합니다. 하지만 싸움은 정부군의 승리와 코뮈나르(코뮌 가담자) 총살로 끝납니다.
 
질서의 적, 코뮌의 아들 딸이 묻힌 파리의 상흔을 시와 영욕이 채웠습니다. 작가 에밀 졸라, 화가 폴 세잔, 에두아르 마네, 클로드 모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 야심가 귀스타프 에펠은 파리의 상실과 희망을 펜과 이젤, 철골로 표현했습니다. 음악으로는 작곡가 에릭 사티, 클로드 드뷔시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기술도 첨단을 달렸습니다. 에두아르 드 라불레가 추진한 자유의 여신상(1871년~1884년, 미국 뉴욕에 1885년 옮겨져 이듬해 조립됨)과 귀스타프 에펠의 에펠탑이 세워졌습니다. 파리에 지하철이 들어섰고, 피에르와 마리 퀴리 부부는 방사선을 내뿜는 라듐을 발견하기도 했지요.
 
P의 거짓 배경인 크라트(Krat) 시도 물질과 예술이 번영했습니다. 새로운 자원인 '에르고(Ergo)' 발견과 이를 통해 움직이는 자동인형의 출현, 빠른 기차와 첨단 기계들은 인간이 노동에서 벗어나 예술에 전념케 했습니다. 이 게임에서도 사람들은 그 시기를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불렀습니다.
 
벨 에포크 시대 파리 최상류 사교의 중심인 리츠 호텔도 문을 열었는데(1898년 6월), P의 거짓의 주된 내용이 펼쳐지는 크라트 호텔이 제페토의 친구이자 사교계 여왕 안토니아 소유라는 설정이 재밌습니다.
 
지난 7일(현지 시간) 사람들이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 앞을 지나고 있다. 사진가 JR이 거대한 동굴을 묘사한 거대 캔버스로 이 건물 외관을 장식했다. 오페라 가르니에 보수 공사는 2024년 말까지 진행된다. (파리·AP=연합뉴스)
 
P의 거짓에 나오는 '에스텔라 오페라 극장' 건물 앞. 프랑스 파리의 가르니에 궁과 내외부가 흡사하다. (사진=P의 거짓 실행 화면)
 
이 시대 예술의 융성을 반영한 부분은 작품 속 크라트 시내 '로사 이사벨 거리'에서 두드러집니다. 거리 끝에는 웅장한 '에스텔라 오페라 극장'이 있는데요. 이 건물은 파리 오페라의 거탑 '가르니에 궁'과 내외부가 흡사합니다. 벨 에포크 시대에 지어진 건물이지요.
 
특히 눈에 띄는 건 게임 속 극장과 거리 곳곳에 붙은 '마녀의 탑과 공주' 공연 포스터·배너입니다. 제작진이 이 포스터 그림체를 알폰스 무하 작품에서 가져왔는데요.
 
무하의 삶 일부는 피노키오와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로잘린드 오르미스턴의 책 '알폰스 무하, 유혹하는 예술가'에 따르면, 그는 학창 시절 낮은 학업 성적과 잦은 결석으로 15살에 제적 당한 뒤 거리 공연으로 생계를 이으며 부모 속을 썩였다고 합니다. 제페토 말을 안 듣고 학교 수업을 듣는 대신 인형극을 보러 간 피노키오가 떠오르는 부분입니다.
 
이후 무하는 아버지 도움으로 지방법원 사무원이 돼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됐는데요. 하지만 자신의 잠재력을 믿고 과감한 선택을 거듭해 화가의 정체성을 만들어갔다는 점에서 자기 운명을 돌파하는 P의 거짓 속 피노키오가 보이기도 합니다.
 
게임 속 피노키오가 죽음을 반복하며 적을 쓰러뜨리듯이, 무하의 삶도 실패와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18살이던 1878년 프라하 미술 아카데미에 지원했다 낙방했고, 1881년 12월 화재로 손실을 본 무대 장치 회사가 가장 어린 직원인 무하를 해고했습니다. 파리 유학이 한창이던 1889년에는 학비 후원이 끊겨 다시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P의 거짓 속 에스텔라 오페라 극장과 거리 곳곳에 붙은 '마녀의 탑과 공주' 공연 포스터. 알폰스 무하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사진=P의 거짓 실행 화면 캡처)
 
무하가 삽화가로 생업 전선에 뛰어든 지 5년 만인 1894년 12월,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휴가 떠난 친구의 부탁으로 교정 작업을 하러 르메르시에 인쇄소로 향했습니다. 그때 무하의 운명을 바꾼 전화 한 통이 르네상스 극장에서 걸려왔습니다. 극장 측은 유명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자신이 공연 중인 연극 '지스몽다'의 기존 포스터에 불만족스러워 한다며, 1월1일 새 포스터를 내걸고 싶어한다고 했습니다.
 
무하는 온 힘을 다해 중세풍의 신비로운 포스터를 그렸습니다. 기존 사각형 틀을 벗어나, 종려 잎을 들고 선 베르나르 전신을 좁고 길쭉한 포스터에 실었지요. 이 포스터 세로 길이는 213㎝에 달합니다. 무하는 그림에 원색이 아닌 자연색을 넣고 곡선미도 강조했습니다. 인쇄소 책임자 브루노프는 경악했습니다. 무하가 포스터는 선이 단순하고 단색을 써야 한다는 상식을 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라는 무하와 6년짜리 계약을 맺고 무대 장치와 의상도 맡아달라 할 정도로 포스터를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이 포스터에 매료된 건 대중도 마찬가지여서, 광고판 포스터 도난이 속출했습니다. 그래서 지스몽다 포스터는 재생산과 재배포가 반복됐습니다. 최초의 굿즈 판매 스타로 알려진 사라는 이 포스터를 4000장 추가 판매해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죠(메리 매콜리프,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벨 에포크는 이처럼 예술의 부흥과 기회의 시대였습니다.
 
알폰스 무하 그림체가 적용된 '마녀의 탑과 공주' 공연 포스터. (사진=P의 거짓 실행 화면 캡처)
 
P, 인간의 영광과 어둠 대조
 
반면 산업화와 반유대주의에 잠식된 파리의 그림자는 짙었습니다. 정부는 가난이 아닌 가난한 사람들과 싸웠으며, 군 수뇌부는 자신들이 엉뚱한 간첩을 지목한 잘못을 덮으려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했습니다. 1894년 12월 참모본부의 유대계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독일군에 비밀을 누설한 혐의로 비공개 군법회의에서 유죄를 선고받아 남아메리카 연안 악마의 섬(영화 '빠삐용'의 무대)에 보내졌습니다. 이후 에밀 졸라가 1898년 1월 신문 '로로르(여명)'에 대통령에게 쓰는 공개 편지 '나는 고발한다'를 쓰는 등 진실을 위한 투쟁이 이어진 끝에, 드레퓌스는 1906년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사이 졸라에 대한 살해 위협, 유대인 구역 약탈과 정부의 명예훼손죄 소송, 진범 에스테라지 소령 무죄 석방, 1899년 8월 드레퓌스 재심 후 징역형 선고와 정부의 사면 등 파리는 이성과 혐오의 불협화음으로 시끄러웠습니다.
 
P의 거짓을 만든 라운드8 스튜디오 역시 작품 배경인 크라트 시 부흥의 어두운 이면을 조명합니다. 자동인형을 대량 생산하는 '베니니 공장'에선 공장주 베니니의 인형보다 월급을 더 받고 싶다는 낙서가 있습니다. 인형에게 참혹하게 살해당한 시신 위에는 충성심 강한 집사 로봇의 홍보 포스터가 붙어있습니다.
 
무명 화가였던 알폰스 무하의 인생을 바꿔준 배우, 사라 베르나르에서 일부 설정을 가져온 캐릭터도 눈에 띕니다. 이 게임 속 에스텔라 오페라 극장에서 크라트 최고의 프리마돈나인 '아델리나 코르데'가 등장하는데요. 제작진이 무하 스타일로 그린 마녀의 탑과 공주 포스터의 주인공입니다. 아델리나는 남성 주인공 역할에 도전해 갈채를 받았다는 설정도 실제 사라의 연기 인생과 닮았습니다.
 
라운드8 스튜디오는 벨 에포크 시대 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연상케 하는 인물 '아델리나 코르데'를 통해, 화려한 무대 위에 선 인간 내면의 어둠을 보여준다. (사진=P의 거짓 실행 화면 캡처)
 
다만 이 캐릭터에는 추악한 내면을 가진 인간의 죄와 후회가 덧붙여졌습니다. 극장의 한 방에서 그녀를 만나 사과를 주면, 자신보다 목소리가 예쁜 동생을 질투해 죄를 지었다는 고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건물 보스 '인형의 왕 로미오'를 물리치고 다시 찾아가면, 병으로 숨진 그녀 옆에 놓인 '매혹(Fascination)'이라는 LP 음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숨지기 직전 그녀가 흥얼거리던 샹송의 기악곡입니다. 크라트 호텔에서 이 곡을 다 들으면 피노키오의 에르고가 속삭이고 '인간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피노키오는 이렇게 인간성을 잃어버린 인간을 상대하며 자기 인간성을 획득합니다.
 
벨 에포크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파괴를 목격하며 자기 시대를 열었고, 그 상실감을 다시 인간의 환희로 채워갔습니다. 이제는 제페토의 인형 피노키오가 첨단 기술과 광기로 얼룩진 크라트 시의 상실을 마주합니다. 선의의 거짓말로 사람을 치유하고, 음악으로 자신을 위로하면서.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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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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