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현지시각) 이스라엘의 공습을 받은 가자지구에서 건물들이 불에 타며 화염과 연기가 치솟고 있다. (사진=뉴시스)
한국 사람들은 오랜 세월 이스라엘을 안보 교과서처럼 여겼습니다. 이스라엘은 몇 차례 중동 전쟁에서 연전연승하며 신화를 쌓았죠. 이스라엘 군대는 왜 싸우면 이길까? 한국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전략과 전술, 청년들의 애국심에 탄복하고 본받으려 했습니다. 국제사회 여론도 이스라엘에 우호적이었죠. 미국, 유럽 등 서방 미디어가 이스라엘을 편들어준 영향이 컸죠. 한국 사람들은 중동 분쟁에서 어떤 자세를 취할지 거의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달 7일 이래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상황이 과거와 정반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 기습을 탐지하거나 막지 못했습니다. 정보와 경계작전에서 실패했죠.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제거한다고 가자 지구를 맹폭격하고 지상작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군사적으로 하마스를 압도합니다. 그뿐입니다.
국제사회 여론은 다릅니다. 지난달 27일 유엔 총회는 요르단이 제출한 이스라엘, 하마스 즉각 휴전 결의안을 찬성 120, 기권 45, 반대 14표로 통과시켰습니다. 유엔 사무총장은 연일 이스라엘의 '과잉 공격'을 비판하고 인도주의 차원에서 즉각 휴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금 유엔 사무총장은 아랍이나 아프리카 출신이 아니라 포르투갈 총리를 지낸 유럽 정치인입니다. 유럽 언론도 이스라엘을 많이 비판합니다. 하마스 기습공격(이스라엘 희생자 1400여명)에 맞선다고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를 공격해 1만명 가까운 팔레스타인 사람을 숨지게 한 것은, 국제법상 자위권 허용 범위와 비례 대응 원칙에 어긋난다는 겁니다.
국내에서는 7일 <국민일보>에 태원준 논설위원이 '실패한 이스라엘 전쟁'이란 제목으로 칼럼을 실었습니다. '반인륜적 테러의 피해자서 비인도적 전쟁의 가해자로 180도 뒤바뀐 이스라엘 처지'라고 부제목을 달았네요. 순복음교회 재단이 소유한, 친아랍이 되기 어려운 보수 신문에서도 이스라엘을 비판했습니다.
국제사회 안보 환경이 바뀌고 있습니다. 과거 관성에서 벗어나 환경 변화를 읽어야 합니다. 자유 진영 대 전체주의 진영이라는 허구 프레임에 갇혀, 다극화하는 세계 현실에 눈을 감으면 곤란합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되짚어 보겠습니다.
첫째, 대외 메시지가 일관되게 신중했나요? 전쟁 발발 초기인 지난달 11일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을 찾은 미국 상원의원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하마스를 강력하게 규탄합니다. 대통령은 다음날 국무회의에서도 같은 견해를 밝혔죠. 당시 '서방 7개국(G7)' 가운데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5개국이 하마스를 규탄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합니다. 일본과 캐나다는 빠졌죠. 일본은 중동에 석유를 의존하는 현실에서, 아랍 여론 향배를 고려했다고 합니다. 한국도 석유 의존도는 마찬가지죠. 한국이 굳이 앞서나가야 해? 성급하고 불안스러워 보였습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22~24일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빈살만 왕세자와 정상회담을 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합니다. 하마스 일방 규탄은 접어두었고, 대신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관련해 '2국가 해법'을 지지했습니다. 2국가 해법은 1993년 미국 주선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맺은 오슬로 협정의 핵심입니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를 중심으로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워주고, 이스라엘은 나머지 땅에서 국가를 유지하도록 하는 안입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죠. 중국과 중동, 아시아, 유럽 여러 나라는 하마스 전쟁 발발 직후부터 2국가 해법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습니다. 미국은 결이 달랐죠. "아직 해법을 논할 때가 아니다"라며 이스라엘 군사 지원을 강화했습니다. 정상외교 때 사우디 쪽이 이 부분을 요청했다고 보입니다만, 어쨌든 한국 정부가 합리적인 선에서 절충했죠.
지난달 27일 유엔 총회 휴전 결의안 표결 때 한국은 기권합니다. 한국과 일본, 영국, 독일 등이 기권했고 프랑스는 찬성했죠. 반대 투표한 14개 나라 가운데 미국과 이스라엘을 제외한 12개 나라는 나우루, 미크로네시아 등 작은 섬나라들입니다. 한국이 미국과 이스라엘을 무조건 따라가지 않고, 나름대로 신중하게 선택했네요.
레바논에 유엔평화유지군으로 파견된 한국군 동명부대 대원들이 지난 2020년 10월 현지에서 거리 순찰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 부대와 현지 교민들이 분쟁에 휘말리거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정세를 관리해야 한다. (사진=뉴시스)
둘째, 중동 현지 교민과 장병 안전에 최선을 다하고 있나요? 전쟁 발발 직후에 우리 공군은 KC-330 공중급유기를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에 투입했습니다. 우리 교민 163명과 일본인 51명, 싱가포르인 6명을 서울공항까지 무료로 태워 날랐죠. 잘했습니다. 해외 비상사태 교민 보호를 위한 장비와 인력은 우리 군이 더 확충해도 좋겠습니다.
레바논에 파견한 한국군 동명부대 안전도 고민해야 합니다. 동명부대는 2007년부터 유엔평화유지군 일원으로 치안 유지 임무를 하고 있습니다. 3백명 규모이며 레바논-이스라엘 국경 20km 위치에 주둔하고 있죠.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얼마 전 국회 국정감사에서 동명부대 철수를 검토하라고 정부에 요구했습니다. 뜻밖의 세력한테 공격당할 가능성을 걱정한 거죠.
시리아와 이라크에 주둔한 미군 기지를 아랍 무장단체들이 수시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편든다고 봐서죠. 우리 동명부대는 유엔이 승인한 유엔평화유지군입니다. 중동 주둔 미군과 위상이 다릅니다. 그렇더라도 분쟁 어느 한 편에 가담한다고 오해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한국군 합동참모본부(합참)가 전쟁 초기에 하마스와 북한 연계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국가정보원은 최근 북한 김정은이 팔레스타인 지원방안을 찾기로 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근거 있는 정보인가요? 하마스와 북한을 묶어, '하마스 때리기'를 하면 어떤 이익이 있죠? 이런 행동을 자꾸 하면 우리 교민과 파병 부대가 위험해지고, 중동 국가와 쌓고 있는 방산 협력 토대가 흔들립니다. 중동 정세와 여론을 고려해 신중히 행동해야 합니다.
셋째, 방산 협력 명분을 잘 유지하고 있나요? 윤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를 방문할 때였습니다. 국내 많은 언론이 정상외교 결과로 방산 수출 '대박을 기대한다'고 앞다퉈 보도했습니다. 여자와 어린이가 떼죽음하는 가자 지구 참극을 앞에 두고, 수출 실적 올리겠다고 한국이 이래도 되나요? 평화와 인도주의 가치를 지지하며 구호물자라도 더 보내자고 주장할 때 아닌가요? 평화를 위해 먼저 노력한 다음에, 방산 물자가 '평화를 지키는 도구'임을 낮은 목소리로 설득해야 합니다. 과거 관성을 버리고 국제사회 변화에 맞춰야 합니다.
■필자 소개 / 박창식 / 언론인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광운대에서 언론학 석사와 박사를 했다. 한겨레신문 문화부장 정치부장 논설위원을 지내고 국방부 국방홍보원장으로 일했다. 국방 커뮤니케이션, 위기관리와 소통, 말과 글로 행복해지는 기술 등을 주제로 글을 쓰고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