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효의 길이냐, 조태열의 길이냐

(황방열의 한반도 나침반) 외교장관 인사 계기로 대중 정책 방향 바꿔야

입력 : 2023-12-22 오전 6:00:00
외교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조태열 전 외교부 2차관이 20일 오전 청문회 준비 사무실이 마련된 서울 세종로대우빌딩으로 출근하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전 정부에서) 한미동맹, 한일관계, 한미일 안보 협력이 다소 소홀해진 측면이 있어 윤석열 정부에서 이를 복원시키는 데 매진하다 보니 한미·한일·한미일 쪽에 치중된 현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 후보자가 20일, 서울 광화문 인사청문 준비 사무실 출근길에 "한중 관계도 한미 동맹 못지않게 중요한 관계"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목할 만한 발언입니다.
 
외교장관 후보자의 첫 메시지, 한국 외교 "한미·한일·한미일에 치중"
 
우리에게 미국은 유일한 동맹국이고, 중국은 미국과 일본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제1교역국이자 제한적이나마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입니다. 때문에 "한중 관계도 중요"하다는 건 "밥 안 먹으면 배고프다"는 말 만큼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윤석열 시대에는 몹시도 생경하게 느껴집니다.
 
다자외교·통상 전문가인 조 후보자는 40년 경력의 직업 외교관 출신입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3∼2016년 경제·다자외교를 총괄하는 외교부 2차관으로, 그 이후 2016년 10월 주유엔 대사에 임명돼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도 유임돼 2019년에 퇴임할 때까지 특별한 색깔이 없는, 전형적인 한국 외교관으로 일했습니다.
 
그런 그가 후보자 지명 이후 첫 발언으로 한국 외교가 "한미·한일·한미일 쪽에 치중된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한 겁니다. 현재의 한국 외교가 얼마나 미국과 일본 쪽으로 편향돼있는지 웅변하는 발언 아닙니까?
 
조 후보자는 "조화롭게 양자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하겠다"고 했지만,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가 2021년 출간한 '자존과 원칙의 힘-40년 외교관의 통상외교현장 스케치'에서 "한미동맹과 한중 파트너십이 제로섬적인 관계로 발전하지 않도록 최대한 지혜를 짜내 양자 간 조화를 이루는 것이 양국 사이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외교, 안보, 통상정책의 기본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밝힌 데서 보이는 균형 감각을 갖고 있다 해도 그렇습니다.
 
김태효 차장, 2021년 "미중 사이에서 적당히 잘 지내면서 모호한 외교 불가능"
 
지난해 5월 집권 이후 윤석열정부는 "지난 5년 사이 본격화된 미국의 대중 봉쇄정책은 마치 과거 소련에 했던 것처럼 중국이 미국 앞에 완전히 굴복하고 쓰러질 때까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며 "이제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적당히 잘 지내면서 모호한 외교를 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 2021년 여름 '미-중 신냉전 시대 한국의 국가전략'논문)는 기조 아래 대외 정책을 펴왔습니다. 심지어 미국이 용산 대통령실을 도청한 명백한 문건이공개됐을 때, 미 국방부는 심각하다고 인정하는데도 정작 한국은 “동맹국인 미국이 우리에게 어떤 악의를 가지고 했다는 정황은 지금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감싸 줄 정도였습니다. 이 정도면 맹목입니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19일 오후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제67차 상임위원회에서 '한반도 정세와 통일·대북정책 추진 방향'을 주제로 연설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반면, 역대 어느 정부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국 편향이라는 윤석열정부에서 장관도 아닌 장관 후보자가 "한중 관계도 한미 동맹 못지않게 중요한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니 '말해야 할 정도'로 현재의 한중 관계는 '심각' 그 이상입니다.
 
한국 기업들을 대표하는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18일 공개 기자간담회에서 "생존의 문제로 접근할 문제"라고 토로하면서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전략을 펼치는 나라는 없다. 지금도 미국 기업이 (우리보다) 훨씬 더 중국을 많이 방문해 투자하고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대중국 비즈니스는) 정치나 안보,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 입장에서는 이성적 게임"이라며 "설사 중국의 영향도를 줄인다 해도 상당히 시간이 필요하며 분야도 잘 골라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 "미중 중 어느 하나 선택하는 전략 펼치는 나라 없다"
 
그는 지난 달에도 "중국이란 큰 시장을 포기한다? 그래선 우리에겐 회복력이 없다"며 "최대 교역 파트너인 중국 시장을 다 잃고 갑자기 대체 시장을 찾아내긴 어렵다"고 말해 파장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
 
안보면에서도 북한이 제 아무리 ICBM을 발사해도 유엔 안보리에서는 중국 등의 거부로 제대로 논의조차 못 하고 있고, 동북아의 긴장은 계속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중국은 지난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아·태평양경제공동체(APEC) 정상회의에서 우리의 정상회담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시진핑 주석과 윤석열 대통령이 3일이나 같은 공간에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 많던 물밑 라인도 다 끊겼습니다. 라인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고 할 말이 없어진 겁니다.
 
대선 과정부터 윤 대통령과 함께하면서 '담대한 구상'을 입안한 김태효 차장은, '이명박정부 2기'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 정부 외교·안보 분야의 등뼈 같은 존재입니다. 현 정부 조현동 주미대사와 이도훈 주러시아 대사, 이충면 외교비서관은 MB정부 청와대에서 행정관으로 당시 김태효 대외전략비서관 밑에서 근무했습니다. MB정부 시절 국방선진화추진위원장과 대통령 직속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의장을 지낸 이상우 서강대 명예교수가 이사장이고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 이정민 전 외교부 국제관계대사 등의 신아시아연구소 그룹의 주 멤버입니다. 또 이 정부 뉴라이트 인맥의 핵심인 한국자유회의를 김영호 통일부 장관 등과 함께 2017년에 발기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이 세게 나가니 중국이 약하게 나온다? 이런 수준으로 더 갈 수 없어
 
반면 조태열 후보자는 계열사 월급쟁이 사장 격인데요, 윤 대통령의 극히 좁은 인재 풀 중 하나인 (서울) ‘법대 형님’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정부 외교·안보라인에는 유독 윤 대통령과 같은 서울 법대 출신이 많습니다. 권영세 전 통일부 장관, 퇴임하는 박진 외교부 장관을 비롯해 이기철 재외동포청장, 김기환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장원삼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 이사장 등이 윤 대통령의 ‘법대 형님’들입니다.
 
‘김태효 그룹이’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상황에서 조태열 후보자가 자신의 입장을 계속 유지·관철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또 그가 이 정부의 외교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외교부 장관직을 맡겠다고 한 것인지도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인물 교체는 변화를 표현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이라는 점에서, (조 후보자가 청문회 등 검증절차를 무난하게 통과한다면) 이번 장관 교체를 대중국 메시지로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리창 중국 총리가 윤 대통령에게 "한일중 정상회의가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한국에서 개최될 수 있도록 적극 호응하겠다"고 한 덕담을, 이어 시진핑 주석이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 온 한덕수 총리에게 "방한을 진지하게 검토하겠다"고 한 덕담을, 한미일 (준)동맹 결성 등으로 한국이 강하게 압박하니 중국이 약하게 나오는 것이라고 아전인수하는, 이런 수준으로 더 가야 할까요? 한중일 호칭을 한일중으로 북중러를 중러북으로 바꾸는, 별 의미도 없이 감정만 상하게 하는, 이런 수준으로 더 가야 할까요?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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