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라인은 모두 끊기고 JSA핑크폰만 남았다

(황방열의 한반도 나침반)윤석열-김정은 '주적' 공방까지

입력 : 2024-01-12 오전 6:00:00
국방부는 지난 달 24일 북한이 동부전선 최전방 소초(GP)에서 감시소를 복원하는 정황을 지상 촬영 장비와 열상감시장비(TOD) 등으로 포착했다고 지난 달 27일 밝혔다. 북한군이 목재로 구조물을 만들고 얼룩무늬로 도색하는 모습. 2023.11.27 (사진 연합뉴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요즘 국제회의에 참석하면 '우크라이나와 가자, 그다음이 어디냐?'는 논의에 접하는데, 놀랍게도 한반도를 그다음 화약고로 지목해요"(관련기사: "우크라·가자 전쟁 그다음은 한반도" )
 
작년 12월 29일 만난 문정인(73) 연세대 명예교수가 한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십여년 간 여러 차례 인터뷰하고, 숱하게 취재해 오는 동안 그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한반도 전쟁을 걱정하는 말을 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바로 그 다음 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신년사격인 당 중앙위원회의 전원회의 '보고'에서 남북관계를 "동족 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며 '대남 노선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천명했습니다.
 
가만있을 윤석열정부가 아니죠.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힘에 의한 평화'에 목소리를 높였고, 이에 맞춰 군은 새해 첫날부터 4일까지 9·19군사합의 상 완충지역 밖 해상과 접경지역에서 군사훈련을 벌였습니다. 북한이 이에 대응해 그 다음 날부터 7일까지 3일 연속으로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9·19군사합의 상 완충지역에 포사격 훈련을 했고, 합동참모본부는 이에 맞서 8일 "지상과 동·서해 해상에 적대행위 중지 구역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공식선언하면서, 9·19합의로 중단했던 백령도·연평도 등에서의 해병도 정례사격도 재개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나마 명목상으로 남아있던 9·19군사합의가 체결 6년 만에 완전히 사라진 겁니다.
 
2018년 김정은 "문 대통령 새벽잠 안 설쳐도 돼"…옛이야기 거리로 전락
 
9·19군사합의 체결 6개월 전인 2018년 3월, 당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등 대북 특별사절단을 만난 김정은 위원장이 "이제 더는 문재인 대통령께서 새벽잠을 설치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던 것도, 옛이야기 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한반도는 그야말로 '일상적 안보 위기 상황'으로 전락했습니다.
 
군사 충돌을 막을 제도적 안전판은 정전협정을 빼고는 모두 사라지고, 남북 간 소통 채널도 다 끊겨 확성기를 들고 외쳐야 겨우 알아듣는 지경입니다. 이제 한반도 내에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유엔군사령부와 북한군이 통화화는 핑크폰만 살아있을 뿐입니다. 우리 땅에서 정작 남북 간 소통은 모두 사라지고, 사실상 미군인 유엔군과 북한군 연결선만 달랑 남은 상황이, 현재의 아슬아슬함을 상징합니다.
 
급기야 김 위원장은 9일에는 "대한민국족속들은 우리의 주적"이라고 단정하면서, 대한민국이 먼저 움직인다는 전제 아래 "대한민국을 완전히 초토화해 버릴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북한의 체제 특성상 최고지도자의 이 같은 규정은 곧 정책화, 행동화를 의미합니다. 칼을 빼서 무 자르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의 '주적'발언은 물론, 윤 대통령이 대선 후보와 당선인 시절에 "주적은 북한"이라 하고, 윤 대통령 집권 이후 국방부가 국방백서에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 규정한 데 대한 대응입니다.
 
이 일련의 과정은 전형적인 '팃포탯'(tit-for-tat·맞받아치기)인데, 이런 상호 위기 상승의 팃포탯 사이클에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국내 여론, 국내 정치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인 2022년 1월 14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
 
푸단대 국제문제연구소 "진짜 전쟁이 북한 최종 목적은 아냐"…김정은도 "일방적 결행은 않겠다"
 
현재의 군사적 위기 고조 상황이 국지적 충돌까지는 몰라도 전면전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중국 푸단대 국제문제연구소는 최근 발표한 '동요와 변혁: 푸단국제전략보고서 2023'에서 "전쟁 위기라는 벼랑 끝 전술로 이익을 얻으려는 게 북한의 근본 전략이지, 진짜 전쟁을 일으키는 게 최종 목적은 아니"라고 분석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도 9일 "대한민국은 주적"발언 중에 "대사변을 일방적으로 결행하지는 않겠다"고 했고요.
 
지금 같은 '팃포탯' 상황에서는, 전면전뿐 아니라 우발적인 국지적 충돌을 막기 위해서도 위기관리가 중요합니다. 상식입니다. 전쟁은 모든 경우의 수를 다 따져보고 면밀하게 계산해서 일으키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1차 세계대전 발발의 장본인인 독일 빌헬름 2세는 나중에 "누구라도 내게 영국이 우리를 대적해 참전할 거라는 걸 미리 말해 주었더라면…"이라고 탄식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군사 사상가의 대표격인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우발성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다른 어떤 인간 활동도 우발성이 차지하는 공간이 이처럼 많지는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김여정, 군사행동 비화 가능 중대사안을 조롱거리로…오기·아집은 북에도 화난
 
세계 어느 집권자, 어느 정부에게도 막막한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상대는 정보 접근이 어려운 북한입니다. 윤석열 정부는 정보 취합과 정세 판단 능력, 의사결정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곳곳에서 드러냈습니다. 부산 엑스포 유치전 참패가 그 생생한 사례 아닙니까? '즉, 강, 끝'과 '선조치 후보고'는 현장 지휘관에게 재량권을 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보여주기식 강경 대응 분위기를 조성해 유연성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해병대 채 상병 사망 사건에서 이를 목격했습니다.
 
강대강-경직성에서는 북한도 난형난제입니다. 북한에서 대남분야를 관장한다는 김여정 부부장은 지난 7일 담화에서 "오판, 억측, 억지, 오기는 만회할 수 없는 화난을 자초할 것"이라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는 포성을 모방한 폭약을 터뜨리는 북한군의 기만 작전에 한국군이 포격인 줄 알고 속아 넘어갔다고 조롱하고 환호작약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군사 충돌로 비화할 수 있는 중대사안을 이처럼 선동거리로 활용하는 오기와 아집은 북한에도 화난(火難)으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황방열 통일·외교선임기자 hb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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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방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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