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운 마침표, 콘솔판 '창세기전'이 남긴 과제

'패키지 부흥 원년 마지막 주자' 기대
골드행 한 달 뒤에야 데모 공개 '혹평'
낮은 가독성에 "휴대용 기본 안 지켜"
"국내·닌텐도 한계? 잘 만들면 팔린다"

입력 : 2024-01-12 오후 5:51:38
[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2023년은 한국 패키지 게임 부흥의 원년이었습니다. 넥슨 '데이브 더 다이버'와 네오위즈(095660) 'P의 거짓'이 연달아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며 세계 시장에서 주목받았습니다. 마지막 주자로 나선 라인게임즈의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도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콘솔 시장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결과는 개발사 레그스튜디오 내 회색의 잔영 개발팀 해체입니다. 이 사실이 밖에 알려진 건 작품 발매 3주도 안 된 시점으로, 직원들이 해산 통보 받은 시점을 고려하면 2주만의 일입니다. 이제 약 50명의 직원 가운데 일부는 창세기전 모바일판 개발사 미어캣스튜디오로 옮기고, 나머지는 권고사직 대상이 됩니다. 레그스튜디오 법인의 앞날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법인 자체가 개발팀과 마찬가지인 점을 볼 때, 법인 정리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이 게임은 초반 몇 장을 지나면 서서히 빨라지는 전개와 화려한 연출이 시너지를 냅니다. 이 때문에 중반부에 들어서면 작품을 손에서 놓기 힘들어지는데요. 그런데 어째서 개발팀 해체 배경으로 '저조한 판매'가 지목되는 걸까요.
 
지난해 12월30일 롯데몰 수원점 내 토이저러스에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이 진열돼 있다. (사진=이범종 기자)
 
한국 RPG의 역사, 창세기전
 
창세기전은 1990년대 한국 롤플레잉 게임(RPG) 역사를 연 1세대 명작입니다. 한국 게임 역사에서 창세기전을 뺀다는 건, 역사 교과서 한장을 찢는 일과 같습니다. 소프트맥스가 1995~1996년 1·2편을, 1999~2000년 3편을 둘로 나눠 출시해 호평 받았습니다. 이후 라인게임즈는 2016년 창세기전 IP를 확보하고 리메이크 개발을 발표했습니다.
 
이후 7년 만에 돌아온 회색의 잔영은 원작 1·2편을 합친 42개 장에 언리얼 엔진4 그래픽 적용, 성우진의 전체 대사 녹음에 따른 80시간 분량으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하지만 발매 전부터 우려가 커졌습니다. '지스타 2023'이 열린 11월 중순 발표한 데모 판이 조악한 그래픽 품질과 불편한 조작 등으로 도마에 올랐습니다. 게다가 완성본 디스크를 공장에 넘기는 '골드행' 시점이 9월 말~10월 초라는 사실이 확인돼 "게임 발매 순서가 맞지 않다"는 비판이 이어졌습니다. 개발사가 데모 판을 공개해 게이머 의견을 수렴하고, 그 결과를 완성본에 반영해 골드행으로 이어지는 게 패키지 게임 발매의 정석입니다.
 
레그스튜디오는 데모 판은 그해 2월 개발 기준으로, 실제 게임 품질과 다르다며 진화에 나섰습니다. 발매 당일 게임 품질과 오류를 바로 잡는 '데이 원 패치'도 공개했습니다.
 
레그스튜디오 간판. (사진=이범종 기자)
 
하지만 데모 판으로 돌아선 여론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우선 이 게임의 유일한 플랫폼인 닌텐도 스위치의 장점을 살리지 못한 점이 패착이었습니다. 닌텐도 스위치에서 게임 화면이 끊기는 현상이 자주 벌어지는데요. 안정된 게임 화면 출력은 패키지 게임의 기본입니다.
 
이번 창세기전에 '첨단'이 없다는 실망감도 있습니다. 1996년 12월 원작 2편 발매 당시 "한국 게임도 일본처럼 고품질로 만들 수 있다"는 기쁨을 안겨준 반면, 2023년 12월에 나온 회색의 잔영은 동시대 닌텐도 게임이 제공하는 그래픽 수준에 한참 뒤떨어졌다는 혹평을 받았습니다. 같은 장르 게임인 '파이어엠블렘'과 '슈퍼로봇대전' 시리즈는 말끔한 애니메이션풍 그래픽으로 최적화된 게임 환경을 보장합니다.
 
여기에 가독성 문제도 컸습니다. 회색의 잔영 글씨는 등장인물의 대사 자막은 물론, 세계관 설명문인 '안타리아의 서'를 쉽게 읽지 못할 정도로 작습니다. 레그스튜디오 측은 게임 발매 전, TV 연결을 우선하고 밖에서 잠깐 게임을 즐기는 점을 염두에 뒀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업계에선 "휴대용 게임의 기본도 안 지켰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휴대용 게임에선 가독성이 기본"이라며 "본질이 휴대용인 닌텐도 스위치에서 글씨 읽기 어렵게 만들어놓고 TV 연결을 우선시했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데, 그렇다고 그래픽이 TV 로 만족할 수준도 아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휴대 화면에선 가독성이 떨어지고 TV로 출력하면 그래픽이 아쉽다 보니, 라인게임즈가 내세운 '서사의 감동'만으로는 흡인력이 떨어진다는 게 업계 평가입니다.
 
애초에 닌텐도와의 협업이 긴밀했는지, 내외부 테스트가 충분했는지에 대해서도 돌아봐야 한다는 의견도 나옵니다. 플랫폼사 입장에선 게이머가 자사 하드웨어에서 즐긴 게임 만족도가 높아야 해당 플랫폼 안에서 후속 구매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콘솔 제조사들은 게임사가 요청할 경우 적극적으로 기술 지원에 나선다는 게 업계 전언입니다.
 
닌텐도 스위치 라이트(사진 아래)에서 실행한 '파이어 엠블렘 풍화설월' 글씨가 닌텐도 스위치 OLED(사진 위)에서 실행한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보다 크다. (사진=이범종 기자)
 
대작 패키지 매출은 해외 비중 커
 
한편으론 이번 게임이 국내 시장, 그것도 닌텐도 플랫폼에 한정 출시된 점도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2 게임백서'를 보면, 2023년 세계 콘솔 게임 시장 규모는 557억5300만달러(약 70조6300억원)으로 전망됐습니다.
 
그에 비해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3년 게임 이용자 실태조사'에서는 게임 이용자 6292명 중 콘솔 이용자가 24.1%에 불과했습니다. 사용 기기는 닌텐도 시리즈가 64.1%로 가장 높았고, 그 뒤를 플레이스테이션(52.3%)과 엑스박스(17.8%) 시리즈가 이었습니다.
 
콘솔 게임을 이용한 적 있다고 답한 1515명 중 게임에 비용을 쓴 응답자는 81.9%였는데요. 이들이 게임 사는 데 쓴 돈의 평균이 13만6358원이었습니다. 회색의 잔영은 6만4800원입니다. 콘솔 게임 평균 지출액의 절반입니다.
 
이 때문에 '회색의 잔영이 세계 출시 됐다면 어땠을까' 하는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100만장 넘게 팔린 네오위즈 P의 거짓 판매량의 90%가 해외에서 나왔고, 300만장 넘게 팔린 넥슨의 데이브 더 다이버 매출도 92%가 해외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펄어비스가 준비하는 패키지 게임 '붉은사막'도 전세계 출시가 목표입니다.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국내에서만 파는 게임이라도 잘 만들면 많이 사게 돼 있다"며 "회색의 잔영이 다른 게임들을 제치고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만한 작품이었는지 냉정히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게임 출시 이후 완성도를 끌어올릴 자본도 충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망작이라고 지탄받던 시디프로젝트의 '사이버펑크 2077'가 지속적인 업데이트로 지금은 명작이라 평가받기 때문입니다.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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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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