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안창현 기자] 윤석열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의료개혁이 갈 길을 잃었습니다. 면밀한 계획과 소통없이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며 밀어붙이기 식으로 진행한 의료개혁은 의료계와 정부의 갈등만 키운 채 해법조차 묘연합니다.
의대 증원에 반발한 전공의들은 집단 사직서를 제출하고 병원을 두 달째 이탈하고, 의대 교수들은 학교별 집단 휴진에 들어갔습니다. 이 가운데 의대를 보유한 상급병원은 경영난에 시달립니다. 설익은 의료개혁이 갈등만 키운 채 진퇴양난에 빠진 셈입니다.
7일 의료계에 따르면 정부는 의료개혁을 위한 사회적 협의체인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의료계와 소통에 나서고 있습니다. 지난달 25일 1차 회의를 개최한 데 이어 이번 주 중으로 2차 회의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의사협회와 전공의 등 의료계가 참여하지 않으면서 여전히 의정 간 대화는 공전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의대 증원과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에 반대해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소아신장분과 교수 2명이 최근 사직서를 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환자들 우려가 커지고 있는 서울의 한 어린이병원이 환자들로 붐비고 있다. (사진=뉴시스)
앞서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의료개혁특위 출범으로 사회적 논의의 장이 마련됐고, 정부는 의료계와 일대일 협의체 논의도 할 수 있다”며 “의사단체들이 대화를 거부하지 말고 의료개혁특위에 참여해 전향적 자세로 대화에 임해주길 바란다”고 촉구했습니다.
정부가 2025년도 의대 모집 정원을 증원분의 50~100%범위에서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게 하면서 ‘2000명 증원’에서 한발 물러났지만, 의료계는 증원 전면 백지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임현택 의협 신임회장은 지난 1일 취임하면서 “의대 증원과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를 전면 백지화하지 않는다면 정부와 협상하지 않겠다”고 강조했습니다.
의협 새 집행부는 ‘증원 백지화’ 없이는 어떤 협상도 임하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일부 의대 교수들도 증원 강행 시 1주간 집단 휴진에 나서겠다는 등 의료계 강경 대응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의대정원 2000명 증원’을 골자로 한 의료개혁에 대해 의료계 반발이 예상됐던 만큼, 정부가 보다 정교한 로드맵과 소통 과정이 필요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회국장은 이 같은 의정 간 대치에 대해 “의료계 반발이 충분히 예상된 상황에서 정부가 의대 증원 문제를 좀더 빨리 사회적 논의로 공론화시켜야 했다”며 “‘의정 협의체’라는 이름으로 당사자인 의료계 협상에 끌려다니면서 사회적 논의 시점을 실기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의대 증원 문제는 어제 오늘 제기된 문제가 아니고, 국민적인 여론의 지지도 받고 있는 사안”이라며 “현상 유지만을 주장하는 의료계와 협상이 힘든 상황에서 사회적 논의 테이블을 빨리 만들고 공론의 문제로 논의를 키웠어야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명확한 의료개혁 방향 제시해야”
의대 증원 외에 필수의료 강화 등 의료개혁의 방향을 뚜렷하게 제시했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의료개혁특위 구성부터 정부의 공공의료와 지역의료를 위한 개혁 의지를 엿볼 수 없다는 겁니다.
김은정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두 달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의사를 증원하고 의료개혁을 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의료개혁특위는 구성원과 논의 내용 모두 의료 산업화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며 “지금 국민들에게 필요한 건 보건의료산업 선진화나 바이오헬스산업 발전이 아니라 의료결핍을 막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의대 증원을 놓고 정부와 의료계 간의 갈등이 이어지며 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병원 교수들이 외래 진료와 수술을 중단한 지난달 30일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소속 교수들이 의대 증원 및 휴진 관련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뉴시스)
의정 갈등이 장기화되는 사이 의대 증원 계획은 후퇴하고 있습니다. 의대 증원의 주요 목표는 지역거점국립대를 거점으로 지역의료 강화를 강화하는 것이었는데, 정작 내년도 의대 정원에서 지역 국립대의 증원분은 감소 폭이 컸습니다.
당초 정부는 내년도부터 의대 정원을 기존 3058명에서 2000명 늘려 5058명을 모집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학교별 증원분의 50~100% 내에서 자율 모집하기로 하면서 10개 국립대 의대는 정원 1767명에서 1366명으로 401명을 줄였고, 사립대는 3211명에서 3121명으로 90명 감원했습니다.
국립대 대부분이 증원분의 50%만 인원을 확정하면서 증원 감소분이 국립대에 몰린 결과입니다. 지역거점국립대를 거점으로 의대와 병원을 강화해 지역의료 불균형을 해소하기로 한 계획이 후퇴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게 된 겁니다.
한 의료법 전문 변호사는 “의대 증원 정책에 대한 의료계의 강한 반발은 이미 예견됐던 일”이라며 “정부가 얼마나 구체적인 로드맵과 원칙을 가지고 흔들림 없이 의료개혁을 추진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안창현 기자 chah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