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베를린 소녀상..."외교부·대사관 나 몰라라"

4년 만에 다시 철거 위기 직면…외교부 "민간 영역" 되풀이하며 '방치'

입력 : 2024-05-22 오후 3:31:28
[뉴스토마토 한동인 기자] 독일 베를린시 미테구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이 일본 정부의 끈질긴 압박으로 철거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민간 차원의 활동'이라며 손을 놓고 있습니다. 때문에 4년 전 유사한 상황에서 문재인정부가 "사죄·반성 정신에 역행하는 행보"라며 일본 정부의 움직임을 직격하고 물밑에서 움직임을 이어간 것과 대비됩니다.
 
지난 2020년 9월 재독 한인단체인 '코리아협의회가' 독일 베를린시에 설치한 '평화의 소녀상'. (사진=뉴시스)
 
일 외교 로비에 굴복...베를린시 소녀상 철거 '시사'
 
베를린시가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일본을 방문한 카이 베그너 베를린 시장은 가미카와 요코 일본 외무상을 만난 자리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을 둘러싼 갈등을 해결한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베그너 시장은 이 자리에서 "우리가 변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베를린과 일본 도쿄의 자매결연 30주년을 맞아 일본을 방문한 건데, 일본 외무상까지 면담하고 소녀상 철거를 시사한 겁니다. 
 
그는 또 관할 구청인 미테구와 연방정부를 포함한 모든 관련 당사자와 대화 중이며 독일 주재 일본 대사도 소녀상 철거 문제에 대한 논의에 참여시키겠다고 했습니다.
 
베그너 시장의 이 같은 입장에는 일본 정부의 끈질긴 압박이 반영돼 있습니다. 그는 여성 폭력에 반대하는 기념물에 대해서는 찬성한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소녀상에 대해서는 한국 측의 '일방적 묘사'가 반영됐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고 전시 성폭력 문제를 알리기 위해 2020년 9월 재독 한인단체인 '코리아협의회'가 독일 베를린에 설치한 여성인권 기념물입니다.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 태평양 전쟁 기간 일본이 최소 14개국에 가한 전시 성폭력 문제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베를린 현지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설치하고 존치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한정화 코리아협의회 대표는 <뉴스토마토> 통화에서 "2022년 6월 미테구의회에서 전시 성폭력 기념비를 예술 작품으로 공모하되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을 거점으로 하자는 결의안이 나온 바 있다"며 "그런데 이후 일본 정부가 평화의 소녀상을 '외교 갈등' 사안으로 인식시키는 활동을 펼쳐왔다"고 꼬집었습니다. 베그너 시장이 밝힌 '일방적 묘사'라는 것이 일본 정부의 로비 활동에 의한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이어 "일본에서는 전시 성폭력 문제를 다루는 조형물이 일본만을 겨냥하지 않도록 뭉뚱그리려는 움직임을 이어왔다"며 "세계 각지에서 펼쳐지고 있는 일본의 로비 활동은 공공연하다"고 말했습니다.
 
물밑서 힘 보탠 4년 전 외교부, 손 놓은 현 외교부
 
더 큰 문제는 일본 정부가 전방위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과 달리 우리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 19일 한국 외교부 당국자는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에 한일 정부가 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해외 소녀상 등의 설치는 전시 성폭력이라는 보편적 인권 침해 문제에 대한 추모·교육 차원에서 해당 지역과 시민사회의 자발적 움직임에 따라 추진된 것"이라며 "관련 동향을 주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자평하는 사이 일본 정부는 평화의 소녀상을 외교 갈등 문제로 비화시켰음에도, 우리 정부는 민간의 문제라며 손을 놓은 셈입니다. 
 
4년 전인 2020년 10월에도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 정부의 압박으로 철거 위기에 놓인 바 있습니다. 당시 문재인정부 외교부도 민간이 설치한 소녀상에 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2020년 10월 8일 김인철 외교부 대변인은 "정부가 관여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고, 일본 스스로 밝힌 바 있는 책임 통감과 사죄 반성의 정신에도 역행하는 행보"라고 직격했습니다. 다시 일주일 뒤인 10월 15일 이재웅 외교부 부대변인은 "현지와 소통하는 등 가능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일본 정부의 의도대로 외교문제로 비화시키지 않고 물밑에서 대응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미테구 의회는 소녀상 존치 결의안을 채택했고, 설치 허가를 연장했습니다.
 
4년이 지난 현재, 외교부의 물밑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한정화 대표는 "일본 정부의 압박으로 독일 현지에서도 소녀상을 지키는 저희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고 있다"며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인식이 되고 있는데, 정부가 직접 나서 소녀상을 지키는 시민사회를 조금이라도 보호해줬으면 좋겠다"고 토로했습니다.
 
한동인 기자 bbha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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