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외교 한 축이 무너졌다

(황방열의 한반도 나침반) 러시아, '한반도 유사시 개입' 통로 재확보

입력 : 2024-06-20 오후 4:20:13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평양을 방문한 블라디마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9일 금수산 영빈관에서 푸틴 대통령이 김정은위원장에게 선물한 아우루스 차량을 서로 몰아보며 친교를 다졌다고 조선중앙TV가 20일 보도했다. (사진=뉴시스)
 
지난해 4월 윤석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가능성을 언급하자, 러시아 푸틴 정권의 2인자인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러시아의 최신 무기가 북한의 손에 있는 것을 볼 때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고 했다. 러시아가 이를 현실화하고 있는 것인가?
 
·러 "전쟁상태 처하면 유엔헌장·북한과 러시아법에 준해 지체없이 군사원조 제공" 협정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9일 평양 정상회담에서 체결한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에서 "쌍방 중 어느 일방이 개별적인 국가 또는 여러 국가들로부터 무력 침공을 받아 전쟁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타방은 유엔헌장 제51조(개별적·집단적 자위권)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러시아연방의 법에 준하여 지체없이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고 고 합의했다.
 
이는 북·러가 1961년에 합의했다가 냉전이 끝난 뒤인 1996년에 폐기한 '유사시 자동군사개입' 조항과 유사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차이가 있다. 이전과 달리 '유엔헌장 제51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러시아연방의 법에 준하여'라는 조건, 즉 제동장치가 붙은 것이다.
 
'유사시 자동개입'을 명시한 1961년 '북·중 조약'(체약 일방이 어떠한 한 개의 국가 또는 몇 개 국가들의 연합으로부터 무력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 체약 상대방은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과도 다르다. 자동개입-군사동맹을 요구한 김정은 위원장에 대해 푸틴 대통령이 유엔 헌장과 러시아법 등의 조건을 붙여 피해 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김 위원장은 ”두 나라 사이 관계는 동맹 관계라는 새로운 높은 수준에 올라섰다"고 했고, 푸틴 대통령은 “한쪽이 침략당할 경우 상호 지원을 제공한다"고 하면서도 김 위원장과는 달리 전혀 ‘동맹’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협정 문안만으로만 보면 북·러가 군사 협력 수준을 거의 '동맹'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올린 것은 분명하다.
 
이번 북·러 정상회담을 앞두고, 레드라인(한계선)을 넘지 말라는 한국 정부의 '경고'에도 아랑곳없이, 러시아는 한반도 유사시에 개입할 수 있는 통로를 28년 만에 다시 확보했다. 러시아가 북한의 경제력을 압도하는 한국과 선을 긋는 협정을 북한과 체결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기대성 예상은 가뿐히 무시했다.
 
1990년 한·소 수교와 1992년 한·중 수교를 통해, 북한의 배후를 압박해온 북방정책의 한 축이 무너졌다는 의미다. 노태우정부가 문을 열고 역대 한국 정부가 모두 계승해온 한국 외교의 빛나는 금자탑, 북방 정책이 윤석열정부에서 파탄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북한과 러시아 입장에서는, 한·미·일이 지역의 안보적 위기가 발생할 경우 공동협의 하도록 의무화 한, 지난해 8월 캠프 데이비드 선언에 대한 강력한 되치기인 셈이다.
 
김정은 위원장 개인으로서도 선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 때 망가졌던 러시아 관계를 복원했다는 점에서,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실패를 어느 정도는 상쇄할 수 있는 외교 업적을 확보한 것이기도 하다.
 
푸틴 "대북 제재 뜯어 고쳐야"…미국 통제 벗어난 무역·결제 시스템 구축
 
국제연합(UN) 등 국제 사회의 대북 경제 제재도 구조적 위기에 빠지게 됐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 주도한 무기한 대북 제재는 뜯어고쳐야 한다"고 했고, 북러 협정은 "쌍방은 치외법권적인 성격을 띠는 조치를 비롯하여 일방적인 강제조치들의 적용을 반대하며…”라고 했다. 미국과 일본, 유럽연합(EU) 등의 대러 및 대북 독자 제재가 '일방적인 강제조치'이므로 이에 개의치 않겠다는 뜻이다.
 
푸틴 대통령은 앞서 평양 방문 직전, 북한 노동신문' 기고문에서도, 북한과 "서방의 통제를 받지 않는 무역 및 호상(상호) 결제 체계를 발전시키고 일방적인 비합법적 제한 조치들을 공동으로 반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국제 금융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와 북한이 미국 중심의 국제 금융시스템과 기축통화인 달러화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체적인 무역·결제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종합하면, 북한이 핵을 가진 채, 미국 등 국제 사회 제재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윤석열정부로서는 미·일 편향 외교에 대한 후과를 톡톡히 치를 수밖에 없게 됐다.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에서 열린 '한중 외교안보대화'에서 양측 수석대표인 김홍균 외교부 제1차관(오른쪽)과 쑨웨이둥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악수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중 차관급 외교안보대화라도 없었다면, 윤석열정부는…
 
이 국면에서 푸틴 대통령이 평양에 들어가기 직전인 18일 한·중 차관급 외교안보대화라도 없었다면, 윤석열정부는 도통 얼굴을 들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국에는 북방외교의 남은 한 축인 중국이 더욱더 중요해졌다는 얘기다.
 
신화통신 등 중국 관영 매체들은 이번 북·러 협정에 대해 중립 또는 긍정적 평가를 내놓고 있지만, 중국 당국의 속내는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북·러 밀착 가속화는 필연적으로 미국의 강력 반발과 한·미·일 연대 가속화라는 '반작용'을 초래할 것이고, 이는 중국의 경제 회복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 북·러 간 밀착은 중국의 대북 영향력 약화로 연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푸틴 대통령의 방북과 한·중 외교안보대화가 중·러 간에 사전 논의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러시아는 북한과의 관계를 진전시켜 한·미·일을 압박하고, 중국은 한·미·일 연대를 약화시키기 위해 한국과의 관계를 관리하는 쪽으로 전략적 조율하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냉전이 해체된 뒤 30여년 만에 동북아 안보환경에 일대 지각 변동이 벌어지고 있다. '북·러', '북·중·러', '한·중·일' 표현을 굳이 '러·북', '중·러·북', '한·일·중'으로 바꾸는 정부 수준으로 이에 대응할 수 있을까?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hb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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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방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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