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차종관 기자] 느닷없는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에도 민주 시민들은 성숙하게 대처했습니다. 늦은 시간이지만 수천명의 군중이 국회 앞으로 모여 "계엄 철폐"를 외쳤습니다. 총을 든 계엄군과 경찰, 시민이 한데 얽히면서 인명피해가 우려됐지만,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시민들은 단상에 올라 저마다 속에 품었던 말들을 꺼내놓았고, 서로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냈습니다. 국회 앞 대로는 순식간에 광장이 됐습니다.
<뉴스토마토>는 3일 밤 계엄령이 선포된 직후 서울시 영등포구 국회로 향했습니다. 국회는 경찰에 의해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습니다. 사무처 직원과 보좌진, 출입증을 가진 기자만 통과가 됐습니다. 4일 오전 12시가 되자 국회 앞 대로는 차가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노동당, 정의당, 진보당과 각 노조의 깃발도 나부끼기 시작했습니다.
3일 밤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정문 모습. 경찰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분노에 가득 찬 시민들은 저마다 국회를 향해 "문 열어", "계엄 철폐" 등을 외쳤습니다. 일부는 촛불을 들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국회 상공에 10대 남짓의 군용 헬기가 날아왔습니다. 국회 앞 대로에는 군용 트럭이 등장했습니다. 시민들은 "계엄군 막아", "입법부를 지키자"를 연호하며 군인들을 둘러쌌습니다.
오전 1시,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찬성 190표로 가결되자 시민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습니다. 만세 소리도 들렸습니다. 이후 시민들은 "윤석열을 탄핵하자"는 내용으로 구호를 바꿨습니다.
현장에서 마이크를 잡은 한 시민은 "계엄령은 해제됐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라며 "의원들이 후속 논의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자리를 지키자"고 외쳤습니다.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된 이후에는 긴박한 상황이 다소 누그러들었습니다. 처음에는 통제되지 않는 듯했던 군중도 어느새 하나의 마이크를 중심으로 대오를 정비했습니다. 휠체어를 탄 시민이 자유롭게 군중 사이를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군중 간 여유 공간도 많이 확보됐습니다.
한 시민이 마이크를 잡고 군중을 향해 연설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스토마토)
정의당에서 보낸 문자를 받고 애인과 함께 국회로 왔다는 박가현(24)씨는 "계엄은 말도 안 되는 짓이다. 끝까지 갔다고 생각했다. 헌법과 민주주의 질서를 무너지게 한 윤석열 대통령을 몰아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탄핵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 이후 공백을 누가 대신할 수 있을지 상이 그려지지 않아서 우려된다"라고도 했습니다.
현장을 기록하러 나온 예술인 신민준(32)씨는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너무 두려웠다. 나가면 총 맞는 거 아닌가 섕각했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는 "계엄 선포는 치밀한 전략과 함께 이뤄질 거라 생각했는데, 시간을 두고 지켜보니 (대통령이 계엄을) 왜 했는지 모르겠다"고 웃어 보였습니다.
역사적 현장을 친구들과 함께 보고 싶어서 국회를 찾은 우건희(17)양 외 5인은 "뭔가 잘못됐다. '서울의 봄'이 아니라 '서울의 겨울'이 찾아온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시민들이 열정적으로 임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면서도 "지금은 서로에게 너무 힘든 상황이다. 빨리 이 시간이 종료됐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전했습니다.
국회의사당 앞에 운집한 시민들의 모습. (사진=뉴스토마토)
오전 4시, 국회 앞 대로의 군중 수는 절반 이하로 줄었습니다. 하지만 집회가 농익으면서 남아있던 시민들의 입이 트였습니다.
이들은 자연스레 마련된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고 저마다 속에 품었던 말들을 꺼내놓았습니다. 발언을 청취한 시민들은 격려의 박수와 환호를 보냈습니다. 국회의사당 앞 대로가 순식간에 시민들이 만든 광장이 된 겁니다. 발언을 하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아 줄을 선 사람이 20명을 초과하는 진풍경도 펼쳐졌습니다.
이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진행이 아주 매끄러워 마치 사전에 준비된 행사를 보는 듯했습니다.
한 20대 여성 발언자는 "침대에 누워있다가 이 자리에 나온 여러분을 보고 부끄러워 참여하게 됐다. 우리는 피로 쓰여진 역사로 민주주의를 만들었다. 이를 이어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역사학도라고 밝힌 대학생은 "국회 앞이 5.18 광주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 달려왔다"며 "비상식적인 권력에 맞서 싸우자"고 했습니다.
현장에 즉석으로 마련된 단상에서 발언하는 시민의 모습. (사진=뉴스토마토)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김모(24)씨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가 내 이야기가 될 줄은 몰랐다. 죽음으로 만든 민주주의가 한 사람에 의해 무참히 무너졌다. 우리가 주권자이기에 승리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그는 "나라의 정의를 바로 세우자"고 외쳤습니다.
경영학을 전공한 대학생 발언자도 "동이 트면 우리가 이 자리에 있었다는 걸 역사가 기억할 것"이라며 "우리의 입법부를 우리 손을 지켰다는 자부심을 가지자"고 했습니다.
이외의 발언자들도 입을 모아 '나라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권력을 사유화하고 국민의 목소리를 무시한 정권을 좌시할 수 없다는 메시지도 드러냈습니다.
추위를 견디며 밤샘 시위를 한 시민들은 오전 11시 경찰이 국회 정문의 출입 통제를 풀자 국회 영내로 들어가 시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차종관 기자 chajonggwa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