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오세은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철강·알루미늄에 이어 반도체에도 최소 25%의 관세 부과를 예고하면서
삼성전자(005930) SK하이닉스(000660) 등 반도체 기업들의 수출 전선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대미 반도체 수출 비중이 중국 등과 비교해 낮다는 점에서, 관세 부과에 따른 피해가 제한적일 것이라면서도 낙관할 순 없다고 했습니다. 인공지능(AI) 칩의 주요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같은 고성능 반도체 공장을 미국에 지으라는 압박 가능성도 있는 만큼, 대비를 해야한다고 조언했습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20일 외신과 업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르면 오는 3월 미국에 수입되는 반도체에 최소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관세 정책’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이는 당초 오는 4월2일에 발표하기로 한 관세 부과 시기가 한 달가량 당겨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미 CNN 방송은 트럼프가 19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 주최로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열린 ‘미래투자이니셔티브 프라이오리티 서밋’ 연설에서 “한 달 내 또는 이보다 빨리 반도체, 자동차, 의약품, 목재 등에 대해 관세를 발표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반도체는 1997년 세계무역기구(WTO)의 정보기술협정(ITA)에 따라 무관세가 원칙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국내 반도체 업계도 촉각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국내 기업들이 미국에 수출하는 반도체 비중이 중국이나 홍콩, 대만 등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낮은 점을 감안하면 관세 부과로 인한 피해는 제한적일 것이라는 게 대체적 시각입니다.
이미혜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영향은 있겠지만 비교적 미국 수출 비중이 낮아 피해 규모는 크지 않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대미 반도체 수출 비중은 7.5%로 중국(32.8%), 홍콩(18.4%), 대만(15.2%), 베트남(12.7%)보다 낮았습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도 “중국 등과 비교해 수출 비중이 낮아 피해는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AI 칩 수요가 큰 상황에서 관세를 부과하면 칩 가격 상승으로 자국 기업들 부담만 커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마이크로소프트는 올해 800억달러(117조원)를 AI 분야에 투자하고, 페이스북 모회사 메타도 650억달러(93조원)를 AI에 투자할 예정이라고 밝힌 상태입니다.
더욱이 반도체 업계의 경우 현시점에선 어떤 품목에 관세를 매길 것인지, 또 한국에서 직접 들여오는 반도체에 관세를 매기는 것인지, 아니면 한국에서 중국 공장을 거쳐 최종적으로 미국에 수출하는 반도체에 관세를 매길지 등 구체적인 부과 방향성이 나오지 않아 관세로 인한 피해 영향의 정도를 가늠하기 조차 어렵다는 반응입니다.
업계 관계자는 “D램(휘발성 기억장치 반도체)도 7나노, 6나노 등 종류가 굉장히 많다. 조립공정도 한 국가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닌, 여러 국가를 오가면서 진행된다”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반도체에 관세를 매길지 등에 대한 방향이 없는 만큼 현재는 피해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1나노(10억분의 1)는 반도체 회로 선폭을 의미하는 단위로, 선폭이 좁을수록 소비전력이 줄고 처리 속도가 빨라집니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서 낸드플래시 공장을 운영하고 있고, SK하이닉스는 중국 우시에서 D램 공장을 가동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건설 중인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 모습. (사진=삼성전자)
‘25%’라는 수치에 집중하기보다는 이를 언급한 트럼프의 속내를 잘 들여다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인 18일(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사저에서 한 기자회견에서 반도체와 의약품 관세에 대한 질문에 “25%, 그리고 그 이상이 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그들(기업들)에게 (미국에 투자하러) 들어올 시간을 주고 싶다. 그들이 미국으로 와서 여기에 공장을 세우면 관세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약간의 기회를 주고 싶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어 “그들(외국 기업 등)이 미국에서 제품을 만들지 않으면, 간단히 말해 관세를 내야 한다는 것”이라며 “그들이 미국에서 제품을 만들면 그들은 관세를 물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사실상 관세 부과 목적이 궁극적으로 외국 기업의 투자 유치에 있다는 점을 밝힌 것입니다.
결국 트럼프의 이같은 발언은 HBM 같은 고부가가치 생산시설을 미국에 지으라는 시그널로 해석되기에 국내 기업들의 투자 부담도 커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교수는 “미국에 반도체 제조시설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며 “메모리 반도체, 그 가운데서도 AI 칩 핵심 부품인 HBM과 같은 메모리 공장을 미국은 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교수는 “(메모리 추가 투자 압박이) 들어올 경우 (우리 기업들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협상 카드로 칩을 사줄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수주 등이 확보되어야 할 것”이라고도 덧붙였습니다.
이때 반도체 기업과 정부와 긴밀한 공조가 이뤄져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합니다. 개별 기업이 미국 정부와 협상을 벌이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연구원은 “기업들이 미 행정부 대상으로 협상력을 갖는데 어려움이 크기 때문에 정부가 전방위적으로 나서 우리 기업에 미치는 영향이 최소화되는 방향으로 협상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대미 수출 1위 품목인 자동차와 의약품에 대해서도 “25% 이상 관세를 붙이겠다”고 밝힌 상태입니다.
오세은 기자 os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