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유지웅 기자] 러시아 위협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습니다. 앞으로 10년간 천문학적 규모의 재정을 국방비에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주요국은 일단은 '문제없다'고 앞다퉈 공언했습니다. 다음은 한국 차례입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미·소 냉전 때보다 높은 "GDP 5%"…각자도생 나선 유럽
나토 32개국은 25일(현지시간) 2035년까지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의 5%'까지 증액하기로 공식 합의했습니다. 지난 2014년 합의된 현행 목표치인 2%의 2.5배 수준으로, 미국·영국을 제외하면 과거 미·소 냉전 시기 국방비 지출보다도 높은 수준입니다.
1970~1980년대 독일·프랑스·네덜란드는 국방비가 GDP의 3% 안팎이었고, 영국은 약 5%, 미국은 6%를 국방에 지출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러시아·유럽 간 대립이 심화하고, 미·중 간 패권 경쟁으로 전 세계가 신냉전 구도로 접어드는 가운데 각국의 안보 비용도 급증하는 시대가 다시 열렸다는 분석입니다.
회원국들은 매년 GDP의 최소 3.5%를 핵심 국방 수요에 투입하고, 이를 위한 연례 계획을 제출하기로 했습니다. 또 GDP의 최대 1.5%는 인프라 보호, 사이버 방어, 방위산업 기반 강화 등 간접 안보 분야에 사용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결국 '직접 국방비 3.5%+간접 비용 1.5%'로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 '5%' 기준을 맞춘 셈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월 취임 이후 줄곧 요구해 온 5% 증액을 나토가 6개월여 만에 이행하기로 한 데 큰 만족감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그동안 불공평하게 과도한 방위비를 부담해 온 미국에 있어 기념비적인 승리"라며 자신의 정치적 성과도 강조했습니다. 국방비 증액을 약속한 대가로, 나토 회원국은 미국의 집단방위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나토의 법적 근거가 되는 북대서양조약의 핵심은 제5조 '집단방위 조항'입니다. 집단방위 공약은 통상 나토 정상회의마다 포함되는 문구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래 회원국들의 국방비 증액 없이는 미국이 집단방위 의무를 다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앞서 지난 2014년 나토 회원국들은 2024년까지 GDP의 2%를 국방비로 지출하기로 약속했었습니다. 그러나 2024년 기준 나토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군대가 없는 아이슬란드를 제외한 31개국 중 2%를 넘긴 회원국은 23개국뿐이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나토 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향하는 전용기에서 "집단방위 5조는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모호하게 답변하며 신경전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이날 자신의 요구안인 5% 증액이 합의되자 "나는 나토 5조를 지지한다. 그래서 여기 있는 것"이라며 "그렇지 않다면 오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태도를 바꿨습니다.
공동선언문엔 "집단방위 원칙에 대한 철통같은 약속을 재확인한다"는 내용 외에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속적 지원도 담겼습니다. 다만 나토 회원국들은 방위비를 산정할 때 우크라이나 직접 기여분 포함하기로 했지만, 해당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강제 수단이나 제재 조치는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또 공동성명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관련 언급은 없었고, 러시아의 침공을 강력히 규탄하는 표현 대신 '러시아는 장기적 위협'이라는 모호한 문구만 담겼습니다. 나토 회원국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환심을 사는 데 급급하며 각자도생에 나섰다는 평가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마르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과 함께 25일(현지시간) 헤이그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 AFP연합뉴스)
"우리가 결정할 일" 선 그었지만…한·일 모두 부담감
트럼프 대통령은 GDP 대비 국방비 지출이 가장 낮은 국가이자, 이번 결정에 뜻을 같이하면서도 여전히 불만을 내비친 스페인을 향해 경고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스페인은 나토 동맹국 중 유일하게 GDP 5% 방위비 규정에 동의하지 않았다"며 "그 대가를 무역 협상에서 2배로 치르게 될 것이고, 내가 직접 협상에 나설 것"이라고 직격했습니다.
스페인은 유럽연합(EU) 회원국이므로 무역에 관해 미국과 직접 협상하지 않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 위협을 현실화하려면, 해당 사안을 EU 전체를 대상으로 한 협정에 포함해야만 합니다.
미국과 직접적인 관세협상에 나서고 있는 한국으로선 난감합니다. 이전 정부에서 '주한미군 분담금 인상'을 관세협상과 연결 지으면서, 국방비·관세 문제가 패키지화돼 있는 게 현실인데요. 미국 측은 "한국·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의 국방비 기준 역시 GDP의 5%"라고 못 박은 상태입니다. 특히 전략자산 전개 비용 등도 한국과 분담해야 한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습니다.
올해 한국의 국방예산은 61조2469억원으로, GDP 대비 2.3% 수준입니다. 미국 요구대로라면, 단기간에 70조원 이상을 국방비로 추가 확보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0%대 저성장 국면과 재정 여건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우리 정부는 이미 모범적으로 많은 국방비를 지출하고 있고, 향후 증액 등은 자체적으로 결정할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일본도 한국과 비슷한 처지입니다. 일본의 올해 국방비 관련 예산은 최대 9조9천억엔(93조4000억원)으로 GDP의 1.8% 수준입니다. 일본 방위성 관계자는 현재보다 3배 가까이 많은 '5% 증액 요구'와 관련해 "절대 수용하기 어렵다"고 <산케이신문>에 말했습니다.
'국방비를 GDP 3.5% 수준까지 늘리라'고 요구받은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는 2.3%로 늘릴 것이라고 밝히면서도, 미국이 제시한 목표에 대한 약속을 거부했습니다.
유지웅 기자 wisema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