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같은 호흡기 바이러스 감염은 휴면 상태에 있던 전이성 암세포를 깨운다. (사진=Wikipedia)
[뉴스토마토 서경주 객원기자] 7월30일 미국 콜로라도 대학 암센터, 뉴욕 몬테피오레 아인슈타인 종합암센터(Montefiore Einstein Comprehensive Cancer Center, MECCC), 네덜란드 위트레히드 대학 메디컬 센터 과학자들이 공동으로 연구해 과학 저널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이 암 연구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논문 제목은 “호흡기 바이러스 감염이 폐에 잠복해 있던 전이성 유방암 세포를 깨운다(Respiratory viral infections awaken metastatic breast cancer cells in lungs)”.
생쥐 실험에서 밝혀진 경고
COVID-19 팬데믹 기간 동안, 암 관련 사망률이 증가했다는 미확인 보고들이 이어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심각한 염증 반응이 휴면 상태에 있던 전이성 암세포(DCC, disseminated cancer cell)를 깨우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가설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연구진은 뉴욕 MECCC의 훌리오 아귀레-기소(Julio Aguirre-Ghiso) 박사 연구팀이 보유한 유방암 폐 전이 생쥐 모델을 이용해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연구팀은 이들 생쥐에 코로나19 바이러스(SARS-CoV-2)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각각 감염시켰습니다.
그 결과 두 바이러스 모두 호흡기 감염을 유발하면서 폐에 잠복해 있던 전이성 암세포(DCC)를 빠르게 활성화시켰습니다. 감염 후 불과 며칠 만에 암세포는 폭발적으로 증식했고, 2주 이내에 명확한 전이성 병변이 형성되었습니다. 감염 이전까지만 해도 해당 암세포들은 완전히 비활성화된 상태였습니다.
활성화된 암세포는 단순히 수가 늘어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주변 조직을 침투하고, 면역 반응을 유도하는 등 공격적인 생물학적 특성이 뚜렷하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어떤 기전이 작용했을까?
이번 연구의 핵심은, 바이러스 감염이 암세포를 어떻게 다시 활성화하는지를 분자 수준에서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연구진은 감염 이후 폐 조직에서 일어나는 염증 반응에 주목했습니다. 감기나 독감 같은 호흡기 질환에 걸리면 우리 몸은 강력한 면역 반응을 일으키며, 이 과정에서 인터페론과 사이토카인(cytokine) 같은 면역 신호 단백질이 대량으로 분비됩니다.
연구진은 사이토카인이 암세포의 유전자 발현을 변화시켜, 휴면 상태를 해제하는 분자 신호 경로를 활성화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특히 두 전사인자(transcription factor)가 주목되었습니다. 하나는 NF-κB로, 염증, 면역 반응, 세포 생존, 스트레스 반응을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STAT3로, 세포 내 신호를 전달하고 유전자 발현을 조절합니다. 이들 염증 관련 신호 경로는 암세포의 ‘각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말하자면, 바이러스 감염 → 염증 반응 → 사이토카인 방출 → 유전자 조절 → 암세포 활성화라는 일련의 경로가 성립된다는 뜻입니다.
분자 수준의 분석 결과, 휴면 상태였던 전이성 암세포(DCC, disseminated cancer cell)의 활성화는 면역세포가 감염이나 조직 손상에 반응해 분비하는 인터루킨-6(IL-6)에 의해 촉진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인간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쥐 실험에서 관찰된 현상이 인간에게서도 똑같이 일어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연구진은 일부 유방암 생존자 사례에서 바이러스 감염 직후 암이 재발하거나 폐 전이가 확인된 경우를 관찰했습니다.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불확실하지만, 주목할 만한 상관관계가 존재함을 시사합니다.
특히 COVID-19 팬데믹은 호흡기 바이러스가 암 진행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색할 수 있는 현실적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코로나19에 감염된 암 생존자는 감염되지 않은 이들보다 암 관련 사망 위험이 거의 두 배 높았습니다.
또한 미국 콜로라도 대학 연구진은 280여 개 병원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COVID-19에 걸린 유방암 환자가 폐 전이를 경험할 가능성이 약 50% 더 높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이 같은 결과를 바탕으로, 연구팀은 현재 암 생존자 코호트에 대한 장기 추적 연구와 인비트로(in vitro) 실험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인간 폐 조직에서의 면역 반응과 암세포 재활성화 간의 연관성을 보다 명확히 파악하기 위함입니다.
다만 연구진은 감염이 암을 ‘직접’ 재발시킨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급격한 면역계 활성화나 만성 염증 상태가 휴면 암세포를 다시 깨울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연구를 이끈 콜로라도 대학 암센터 제임스 드그레고리(James DeGregori) 박사는 이렇게 비유합니다.
“잠복 암세포는 버려진 모닥불에 남은 잉걸불과 같고, 호흡기 바이러스는 그 불씨를 다시 일으키는 강한 바람과 같습니다.”
예방과 모니터링, 새로운 치료법의 가능성
이번 연구는 임상적, 예방의학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우선, 암 생존자들에게 감기, 독감, 코로나19와 같은 호흡기 감염병에 대한 예방 조치는 단순한 건강 관리 차원이 아니라, 암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백신 접종, 개인 위생, 호흡기 질환 예방을 위한 생활 관리 등은 이제 암 관리의 일환으로 재조명되어야 합니다.
둘째, 면역 반응이 암세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는 바이오마커 개발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특정 염증성 사이토카인(IL-6 등)의 농도나 NF-κB 활성화 상태를 주기적으로 모니터링함으로써, 암세포가 다시 깨어나려는 신호를 조기에 감지할 수 있는 기술이 연구되고 있습니다. 이는 조기 개입 가능성을 높이고, 예후 관리의 정밀도를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셋째, 휴면 상태의 전이성 암세포를 다시 ‘재우는’ 방향의 치료 전략, 즉 ‘휴면 유지제(dormancy-sustaining agents)’ 또는 ‘활성화 억제제’ 개발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약물은 기존 항암제가 목표로 하지 못했던 비활성 암세포에 작용함으로써, 암 재발을 예방하는 새로운 치료 축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번 연구는 궁극적으로 ‘감기 한 번’이 단순한 일시적 질병에 그치지 않고, 암의 재활성화를 촉진할 수 있다는 생물학적 연결 고리를 제시합니다.
바이러스는 인터루킨6(IL-6)를 증가시키고 휴면 상태의 중간엽 유사 유방암 전이 세포(DCC)의 각성과 확장에 기여한다. (이미지=CUCC)
서경주 객원기자 kjsuh5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