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장류 식품공전 개악 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 대표들. (사진=녹색소비자연대)
[뉴스토마토 임삼진 객원기자] 9월10일 오전 9시20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장은 이른 아침부터 긴장된 분위기로 가득했습니다. ‘장류 식품공전 개악 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가 추진 중인 장류 식품공전 개정안에 대해 “전통 장의 뿌리를 흔드는 개악”이라 규정하며 강력한 반대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기자회견장에는 농민단체, 소비자연대, 환경단체, 학계까지 총출동해 “국민 건강과 권리를 위협하는 졸속 행정”이라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간장·된장·고추장 하나로 묶는 발상 자체가 문제”
식약처는 지난 8월 장류협동조합의 건의를 근거로, 현행 간장의 다섯 가지 유형을 ‘간장’이라는 단일 항목으로 통합하는 방안을 검토 중입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3월부터 12월까지 ‘식품공전 분류체계 및 기준·규격 개선 연구’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행정적 단순화 조치처럼 보이지만, 대책위는 “이는 단순 기준 변경이 아닌 한국 전통 발효 장문화의 근간을 뒤흔드는 위험한 시도”라고 지적합니다.
대책위 관계자는 “전통 장의 정체성을 ‘조미식품’ 범주에 넣는 것은 2000년 이어져온 장문화의 역사성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발효 과정을 거친 전통 간장과, 콩 단백질을 염산으로 분해해 며칠 만에 만든 ‘산분해 간장’을 동일하게 묶는 것은 소비자 기만”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발효 없는 화학 장류, “간장이라 부를 수 없다”
문제의 핵심은 ‘발효’입니다. 대책위는 장의 본질이 곡물을 띄우고 기다려 얻는 발효에 있는데, 이를 무시한 채 대량 생산된 화학적 가공품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명백한 왜곡이라고 주장합니다.
산분해 간장은 콩 단백질을 염산으로 분해하고 중화제를 넣은 뒤, 인공 조미료와 색소를 첨가해 불과 3~4일 만에 대량 생산됩니다. 대책위는 “이는 전통 장이 아니라 ‘화학 조미료’일 뿐”이라며 “이를 ‘간장’이라 부르면 소비자는 제대로 구별할 권리를 잃는다”고 지적합니다.
실제로 일본과 유럽연합(EU)에서는 전통 발효식품을 별도의 기준으로 보호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JAS(일본농림규격)를 통해 미소(된장)를 ‘누룩곰팡이로 발효한 대두 페이스트’라고 정의하고, 원료·발효균종을 명확히 규정합니다. 쇼유(간장) 역시 고이쿠치·우스쿠치·다마리 등 다섯 가지 유형으로 공적 분류해 소비자가 제조 방식과 맛의 차이를 알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EU도 ‘전통특산품보호제도(TSG)’를 통해 전통 방식으로 만든 발효 치즈, 햄 등을 따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EU는 발효미생물·반죽 물성·가열 조건까지 ‘레시피·공정의 디테일’을 규격으로 못 박아 소비자의 혼동을 막습니다. 한국 ‘장류 통합’ 논의와 정반대 방향의 미세 분류·표준화 모델입니다. 발효식품 생산자인 장수이야기 손찬락 대표는 “세계가 전통 발효식품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가는데, 한국만 역주행을 하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국민의 알권리·선택권 박탈하는 행정”
대책위는 이번 개정안이 소비자의 알권리를 침해하는 조치라고 비판했습니다. 된장·고추장·청국장·메주 등은 제조 과정과 건강 효과가 달라 반드시 구분돼야 하며, 이를 단순히 ‘장류’라는 이름으로 통합하면 소비자는 어떤 제품을 선택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국민은 자신이 먹는 장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알권리가 있다. 발효 장인지, 화학 장류인지조차 구별할 수 없게 만든다면 소비자의 기본권인 선택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라고 대책위는 지적합니다.
장류 식품공전 개악 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에는 전국먹거리연대, GMO반대전국행동, 간장포럼, 한국장류발효인협회, 녹색소비자연대 등 다양한 시민·농민·환경단체가 총집결했다. 가톨릭농민회, 한살림, 두레생협, 행복중심생협 등 생협 조직부터 녹색당·환경정의 같은 환경단체, 전국농민회총연맹과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같은 농민단체까지 폭넓게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이번 사안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한국의 전통 식문화, 국민 건강, 소비자 권리를 동시에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라고 강조합니다.
대책위는 성명에서 ▲정부는 즉각 식품공전 개정안을 철회할 것 ▲발효 방식과 제조 과정에 따라 세분화된 분류 체계를 마련할 것 ▲개정 과정과 연구 자료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소비자·생산자가 참여하는 숙의 과정을 거칠 것을 요구했습니다. 대책위는 “국민 건강을 지키고, 소비자의 권리를 보장하며, 한국의 전통 문화를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라며 “식약처가 내세운 ‘국민이 안심할 때까지’라는 구호에 걸맞게, 이번 개정안을 국민이 납득할 때까지 철회해야 한다”고 강하게 촉구했습니다.
“장류 통합은 한국 전통문화의 시험대”
발효 장은 미생물 생태계가 만들어내는 복합 발효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장이 됩니다. 단순히 ‘간장’이라는 이름 아래 화학 조미료와 통합하면 한국 장문화의 정체성이 훼손될 뿐 아니라, K-푸드 세계화에도 치명적 악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전통 장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민족의 문화유산”이라며 “행정 편의주의로 전통 장의 가치를 축소한다면 국제사회에서 한국 전통 발효식품의 위상도 크게 흔들릴 것”이라는 학계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번 논란은 단순한 ‘식품 기준 정비’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전통 식문화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에 대한 시험대라는 평가도 나옵니다. 장류 식품공전 개정안을 둘러싼 논란은 단순히 행정 편의의 문제가 아닙니다. 발효 장을 지켜내려는 목소리와, 산업적 효율성을 앞세우는 행정 논리가 충돌하고 있습니다.“발효 없는 장은 장이 아니다”라는 목소리는 행정편의주의가 불러올 오류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장류 식품공전 개악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의 요구가 담긴 리플릿. (사진=녹색소비자연대)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