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 우리 안의 ‘김부장’

입력 : 2025-11-12 오후 4:33:35
지금은 전 직장이 된 신문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 진보적이고 때론 좌파적(?)이기까지 했던 사풍과는 다른 선배들의 ‘뒷담화’에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있다. 선배들은 ‘아무개가 8학군 출신으로 강남 키즈였다’거나, 또 다른 누군가가 ‘고3 때 전국모의고사 4등을 했다’는 얘기를 농담 삼아 나누곤 했다. 어느 선배의 강남 아파트가 재건축에 들어갔고, 또 다른 선배는 자식을 서울대에 보냈다며 부러워하는 말들도 빠지지 않았다. 
 
일관되게 강남 공화국을 비판하고 서울대 폐지를 지지했던 논조가 무색하도록 기자들의 시선은 자못 세속적이었다. 물론 그것은 정치적 스탠스를 잠시 내려놓고 직장 동료와 부담없이 나눈 스몰토크의 일환이었을 수도 있다. 또한 일정 정도의 속됨은 권력과 재화의 향방을 좇는 대중매체의 태생적 보수성에서 비롯된 일이기도 한 데다, 아울러 장삼이사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는 점에서 일견 필요한 관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신문사가 창간 때 보여준 변혁적 열기에 비춰보면 구성원들의 현실주의가 도드라져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에서 김낙수 부장은, 후배 부장의 아파트가 자가가 아닌 전세이길 바라고, 배 가까이 오른 자신의 아파트보다 강남 서초 아파트값 상승을 부러워한다. 과장보단 더 비싸되 상무보단 더 싼 명품백을 살 정도로 처세에 민감한 그는, 외제차를 산 후배가 같잖아 배가 아픈 인물이다. “한국 사회에서 평범하게 살기가 쉽냐”며 상위권 대학을 나온 아들이 자신과 같은 대기업에 취업하길 바란다. 전형적 속물에 ‘핵꼰대’라고 부를 만하다.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에서 김낙수 부장은 전형적 속물로 묘사된다. (사진=JTBC)
 
김부장의 도저한 속물근성에 웃음 지으며 속으로 ‘난 저 정도는 아닌데’ 싶다가 가만히 돌이켜보니 뒷골이 서늘했다. 놀라워라. 화면 속 김부장의 모습에 고스란히 내가 겹쳐 보인 탓이었다. 김부장처럼 언제부턴가 나도 내년에 고3이 되는 아들 녀석이 아비가 누렸던 알량한 ‘학벌 프리미엄’을 누리길 은근히 바랬고, 아내의 결단으로 등 떠밀려 아파트를 사놓은 주제에 이젠 “왜 우리 아파트만 오르지 않냐”며 “그때 더 질러서 서초동 아파트를 샀어야 했다”고 말하곤 했다. 학창 시절 나보다 공부를 못했던 친구 녀석이 외제차를 뽑았을 때, 그날 밤 그 차 가격을 검색하면서 뒤척인 일도 떠올랐다. 어느 순간 나도 전 회사의 선배들처럼 현실론자이자 속물인 김부장이 돼 있던 것이었다. 
 
드라마는 김부장을 밉지 않고 되레 짠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실제 김부장들은 얼마나 한심스럽나. 물론 김부장들이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천민자본주의가 지배해온 한국 사회에서 돈과 사회적 성공이 가지는 위세가 다른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강력했다는 점에서 구조의 산물인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순 없다. 김부장의 퍼스낼리티는 ‘메이드 인 코리아’인 셈이니까. 
 
그렇다고 ‘우리 안의 김부장’이 미덕일 수는 없다. 생각한 대로 살지 않고 사는 대로 생각할 때, 인간은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가 된다. 물론 개과천선할 엄두는 내지 못하는 처지라 다만 나는 ‘염치’라는 덕목을 잊지 않기로 했다. 내가 어느새 기득권이 됐다는 자각도 함께.
 
오승훈 산업1부장 grantorino@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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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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