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사이언스)2025년, 의학·생명과학 10대 발견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선정
예방·조기개입 강조 패러다임

입력 : 2025-12-29 오전 10:27:58
2025년은 건강과 의학을 바라보는 관점이 눈에 띄게 달라진 한 해였습니다. 질병이 발생한 뒤 치료하는 데 집중하던 기존의 의료 패러다임은 예방과 조기 개입, 그리고 개인의 생물학적 특성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이동했습니다. 과학 저널과 임상 현장에서는 “몸이 병들기 전 어떤 신호를 보내는가”, “생활 속 개입이 장기적인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질문이 점점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과학 전문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은 이러한 흐름을 반영해, 2025년 한 해 동안 건강에 대한 인식을 바꿨다고 평가할 만한 주요 과학 연구 성과 10가지를 정리해 소개했습니다. 이 연구들은 특정 질병의 치료법을 하나 더 늘린 수준을 넘어, 인간의 몸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대상포진백신 접종자들은 비접종자에 비해 치매진단 위험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대상포진백신을 접종하는 모습. (사진=게티이미지뱅크)
 
1. 대상포진 백신, 치매 위험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연구 가운데 하나는 스탠퍼드대, 옥스퍼드대, 카디프대 연구진이 공동으로 수행한 대상포진 백신과 치매 위험의 관계를 다룬 대규모 역학 연구였습니다. 영국 웨일스의 보건의료 행정 데이터를 약 7년간 추적·분석한 결과, 대상포진 백신을 접종한 집단은 비접종 집단에 비해 이후 치매 진단 위험이 낮게 나타났습니다. 이 결과는 바이러스 감염이 단기적인 질병을 넘어 장기적으로 뇌 건강과 연관될 수 있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인구 수준의 증거로 해석됩니다. 연구진은 백신이 신경퇴행성 질환 위험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지만, 예방의학의 범위를 넓힐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학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2. 배아 착상, 3D 영상으로 재현
 
생식의학 분야에서도 오랜 미지로 남아 있던 영역이 보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영국 프랜시스 크릭 연구소(The Francis Crick Institute)의 마그달레나 제르니카-괴츠(Magdalena Zernicka-Goetz) 박사는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대(Utrecht University) 연구진과 함께, 인간 배아와 자궁 환경을 모사한 실험실 모델을 이용해 착상 초기 과정을 3차원 영상으로 재현했습니다. 이 연구는 배아가 자궁 조직과 상호작용하는 초기 단계를 시간순으로 시각화함으로써, 불임과 반복 유산의 원인을 보다 정밀하게 이해할 수 있는 과학적 단서를 제시했습니다. 실제 임신 과정을 직접 관찰한 것은 아니지만, 보조생식술의 성공률을 높이는 데 중요한 기초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3. 남성 피임약, 안전성 입증 단계
 
피임의 책임을 둘러싼 오랜 성별 불균형에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비호르몬 방식의 남성 경구 피임약이 초기 인체 안전성 시험을 통과하면서, 남성 피임이 더 이상 이론적 가능성에 머물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번 연구는 미국 바이오 기업 유어초이스 테라퓨틱스(YourChoice Therapeutics)가 웨일 코넬 의과대학(Weill Cornell Medicine) 연구진과 협력해 수행한 것으로, 비호르몬 방식의 남성 피임이 임상 단계로 진입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직 효과와 장기적 안전성에 대한 추가 검증이 필요하지만, 피임을 여성에게만 맡겨온 기존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전환점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4. 커피와 장내 미생물 연관성
 
일상적인 식습관과 장내 미생물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한 연구도 대중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하버드 공중보건대학원의 니콜라 세가타(Nicola Segata) 교수 연구팀은 수만 명 규모의 장내 미생물과 식이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커피를 규칙적으로 섭취하는 사람들의 장에서 장 건강과 연관된 특정 세균이 더 풍부하게 나타나는 경향을 확인했습니다. 이들 세균은 장내 대사 과정과 관련된 물질을 생성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커피 섭취가 장내 생태계를 통해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5. GLP-1 약물, 몸과 뇌 잇는 신호
 
비만과 당뇨 치료제로 사용되는 위고비와 오젬픽 등 GLP-1 계열 약물에 대해서도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과 유럽 연구진이 수행한 여러 임상 및 뇌영상 연구에 따르면, 이 약물은 식욕을 억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음식에 대한 선호와 관련된 뇌 반응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일부 환자에서 술 같은 특정 음식에 대한 욕구가 현저히 줄어드는 현상은 체중 조절이 단순한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뇌와 장을 연결하는 신호 체계와 깊이 연관돼 있음을 시사합니다.
 
6. 조류 독감, 인간 감염 위험 재평가
 
감염병 연구에서는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동물과 인간 사이를 오가는 방식에 대한 이해가 한층 정교해졌습니다. 일본 국립감염증연구소를 비롯해 미국과 유럽 연구진이 수행한 여러 연구는 바이러스가 종 간 장벽을 넘는 조건과 경로를 분석해, 향후 팬데믹 가능성을 보다 과학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이러한 연구들은 공포를 과장하기보다는, 감시 체계와 대응 전략을 사전에 정교화해야 한다는 공중보건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건강보조제에 대한 연구 결과가 축적되면서 건강보조제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7. 건강보조제의 과학적 검증
 
건강보조제에 대한 과학적 검증도 진전을 보였습니다. 오메가-3 지방산이나 비타민 D와 같은 일부 보충제가 염증 반응이나 노화 관련 지표와 연관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축적되면서, 건강보조제에 대한 인식도 ‘무작정 섭취’에서 ‘근거 기반 선택’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특히 하버드 의대와 브리검 여성병원을 중심으로 수행된 대규모 무작위 임상시험 VITAL(VITamin D and OmegA-3 TriaL)의 하위 분석은 비타민 D 보충이 텔로미어 단축 속도와 연관될 수 있다는 결과를 제시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8. ‘부드러운 멸균’, 소독 기술 발전
 
소독과 위생의 영역에서는 기존의 강한 화학물질 대신 인체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방식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히포클로러스산(hypochlorous acid)은 오래전부터 염소 소독의 핵심 성분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에는 저농도·안정화 기술이 발전하면서 의료와 생활 소독 분야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 기술은 피부 자극을 최소화하면서도 미생물 제거 효과를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며, 의료 현장과 일상 위생 관리 모두에서 활용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9. 입덧, 치료 가능성 열어
 
임신 초기 일부 여성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는 중증 입덧(hyperemesis gravidarum)의 원인을 규명한 연구도 높게 평가됩니다. 서던 캘리포니아대(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의과대학 연구진이 주도한 이 연구는 중증 입덧이 단순한 개인차나 심리적 요인이 아니라, 특정 호르몬과 생물학적 메커니즘과 깊이 연관돼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이는 입덧을 ‘불가피한 임신의 대가’가 아니라 치료와 관리의 대상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10. 면역 메커니즘 연구, 노벨상
 
2025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면역계의 핵심 조절 메커니즘을 규명한 세 명의 과학자에게 수여됐습니다. 메리 E. 브런코, 프레드릭 J. 램즈델, 사카구치 시몬은 면역계가 스스로를 공격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말초 면역 관용’의 분자적 원리를 밝혀냈습니다. 이들의 연구는 조절 T세포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자가면역질환 치료, 이식 거부 반응 억제, 암 면역치료 전략 개발로 이어질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열 가지 연구가 공통으로 보여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건강은 더 이상 병원 안에서만 결정되지 않으며, 감염·면역·유전·미생물·생활습관이 얽힌 복합적인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2025년에 이뤄진 괄목할 만한 의학·생명과학 연구는 인간의 몸을 외부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동적인 시스템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있습니다.
 
서경주 객원기자 kjsuh57@naver.com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서경주 기자
SNS 계정 : 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