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기자] 정부의 증시 부양 정책으로 추진된 상법 개정, 자사주 의무소각 등 강력한 제도적 드라이브가 자본시장의 토대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동안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범으로 지목되던 후진적인 기업 지배구조(거버넌스)를 뜯어고치기 위한 제도적 판이 깔리자, 시장의 시선은 실효적 권리를 무기 삼아 전면에 나선 주주행동주의의 '실전 양상'으로 쏠리고 있습니다. 기관투자자와 행동주의 펀드가 기업의 낡은 이사회와 정면승부를 벌이는 행동주의 시대가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주가 올라도 엑시트 없다"…명분 찾는 행동주의
17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내 자본시장을 공략하는 행동주의 펀드들의 색채는 과거와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단순한 단기 차익 실현(Exit)을 넘어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이 완료될 때까지 장기전을 불사하는 흐름도 부각됩니다.
과거 '기업 사냥꾼'으로 치부되던 행동주의 펀드들이 '지배구조 개선 완료'를 엑시트의 전제 조건으로 내거는 기류가 감지됩니다. 실제로 국내 한 대형 가치투자 운용사의 경우 투자 기업의 주가가 매수가 대비 폭등했음에도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근본적인 목적이 달성되지 않았다"며 지분 매각을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펀드 출자자(LP)들 역시 단기 수익 확정보다는 기업 가치의 근본적 제고에 동의하며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행동주의 펀드의 기존 '먹튀' 인식에서 벗어나, 시장 개선에 기여하는 기관투자자로서의 신뢰도를 쌓겠다는 전략으로 해석됩니다.
정교해진 행동주의 기술
공세의 방식도 정교해졌습니다. 대주주 의결권이 3%로 묶이는 '3% 룰'을 활용해 감사위원 진입을 노리거나,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사내이사인 지배주주의 '보수한도' 의결권 제한을 집중 타격하는 등 법리적 약점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해외계 행동주의 펀드들의 공세 역시 고도화됐습니다. 과거 공격적인 언론 플레이에만 집중했던 것과 달리, 최근에는 국내 투자기관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해 자신들의 제안이 지닌 법리적 타당성을 설득하고 나섰습니다. 외국계 펀드가 통역까지 동원해 국내 기관들과 장시간 화상회의를 거치는 등 주주제안 안건 표대결에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상대하는 국내 기관의 방어벽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사회 고유 권한의 훼손을 경계하는 탓입니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주주제안이 이사회의 고유 권한을 침범하거나 법적 범위를 벗어나는지에 대해 지금까진 법률 전문가들이 보수적으로 접근해 왔다"며 "제안의 취지가 아무리 좋아도 법리적 결함이 있다면 반대 표결이 우세했던 구도"라고 전했습니다.
가비아 판결과 연금 수수료가 낸 균열
이러한 기관의 보수적 기류에 균열을 낸 것은 사법부의 판단과 국민연금의 제도 개편입니다. 최근 법원이 가비아 주주제안 가처분 소송에서 사실상 얼라인파트너스의 손을 들어주는 취지의 결정을 내리면서 시장에 강력한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간 '이사회 권한 침해'라는 법리적 논리로 주주제안을 깐깐하게 방어해 온 상장사와 보수적 기관들의 고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여기에 자본시장의 큰손 국민연금이 불을 지폈습니다. 금융계는 현재 국민연금이 위탁운용사 선정 및 수수료 산정에 '스튜어드십 수탁자 책임 이행 정도'를 강력하게 연동하겠다는 방침을 세우면서 긴장하는 분위기입니다. 거수기 역할에 머물던 기관투자자들에게 수수료 삭감이라는 치명적인 경제적 압박 카드를 꺼내 든 것입니다. 국민연금의 압박과 법원의 전향적 판결이 맞물리면서, 다음 주총 시즌부터는 기관투자자들과 행동주의 펀드의 목소리가 기업 경영에 더욱 적극적으로 반영될 전망입니다.
"국민연금, 독립성 강화 필수"
이러한 지배구조 개혁의 성패는 결국 국내 최대 기관투자자인 국민연금이 실질적인 스튜어드십 코드를 얼마나 충실히 이행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최근 국회 토론회에서 국민연금의 '보여주기식' 수탁자 책임 이행을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박 교수는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이후 주주제안 및 경영참여 주주권 행사가 극히 제한적이었으며, 2019년 주주대표소송 제도를 도입한 이후 현재까지 실제 소송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그는 관치 금융의 한계를 타파하기 위해 국민연금의 쇄신을 주문했습니다. 박 교수는 "국민연금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것이 시급하며, 이사장 임기를 10년으로 늘리고 국회 인준을 거치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위탁운용 규모를 확대하고 운용사 선정 시 적극적 주주권 행사 여부를 평가 기준에 엄격히 포함하는 한편, 주총에서 실질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행동주의의 빛과 그림자, '그린메일' 경계령
정부의 증시 부양 정책, 사법부의 전향적 판례, 국민연금의 수수료 압박 등이 맞물려 기관 주도 행동주의가 거세지고 있습니다. 거수기로 전락한 이사회를 정상화하고 합리적인 자본 배치를 요구하는 행동주의의 확산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장 한편에는 우려의 시선도 상존합니다. 주주가치 제고라는 명분을 내세워 경영권을 위협하고 단기 차익만을 챙겨 떠나는 '그린메일(Greenmail)'에 대한 경계심입니다.
자본시장 관계자는 "지배구조 개선의 궁극적 목적이 기업의 장기적 펀더멘털 강화에 맞춰지지 않고 행동주의 펀드의 화려한 엑시트 수단으로만 소비된다면, 그 피해는 기업의 경쟁력 저하와 일반주주들의 손실로 직결된다"며 "단기 수익의 유혹을 뿌리치고 기업의 지배구조가 본질적으로 개선될 때까지 끈질기게 호흡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