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우리는 왜 가짜 영웅에게 매료되는가

입력 : 2026-04-28 오전 6:00:00
최근 세계 곳곳에서 관찰되는 소위 ‘강한 남성’에 대한 열광과 숭배 현상은 우리 시대의 도덕적 토대가 어디에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무례하고 공격적인 언사와 윤리적·법적 경계의 선을 뛰어넘는 거친 행보를 ‘결단력’이나 ‘강함’으로 용인하는 흐름 속에서, 우리는 이들의 잔인한 행태조차 승리를 위한 훈장처럼 여기곤 한다. 하지만 이처럼 강자를 숭배하고 약자를 공격하는 현상은 인류가 오랜 시간 어렵게 쌓아온 문명적 가치가 야만의 도전에 다시 직면했음을 뜻한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우리의 도덕 감정이 부패하는 가장 보편적인 원인으로 부유하고 강력한 자를 숭배하려는 성향을 지적했다. 인간은 지혜롭고 덕이 있는 자보다 부유하고 강력한 자의 화려한 상태에 더 쉽게 ‘동감(sympathy)’한다. 동감이란 타인의 처지에 자신을 상상적으로 놓아봄으로써 그 감정을 함께 느끼려는 능력이다. 그런데 대중은 강력한 권력자의 승리와 환희에 자신을 대입하며, 그들의 악행까지 ‘불가피한 선택’으로 정당화하곤 한다. 부와 권력의 광채에 압도당한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과 감정을 제삼자의 눈으로 돌아보는 ‘불편부당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의 목소리에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게 되고, 오직 승리자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보는 도덕적 맹목에 빠진다.
 
스미스는 이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든다. 인간 앞에는 존경을 얻기 위한 두 갈래 길이 놓여 있다. 하나는 ‘지혜와 덕의 실천’이고, 다른 하나는 ‘부와 권력의 획득’이다. 후자가 훨씬 눈부시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광채에 이끌린다. 이 길 끝에서 권력을 쥔 야심가들은 법 위에 올라서서 사기와 거짓은 물론 반란과 내전까지 서슴지 않는다고 스미스는 경고한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대중의 반응이다. 성공의 광채가 수단의 부도덕함을 덮어준다고 믿기에, 대중은 악덕을 자랑하고 덕을 오히려 숨기는 존재로 전락한다. 하지만 대중이 강자의 오만과 전횡에 무한히 갈채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스미스에 따르면 아무리 고귀한 지위라 해도 악덕과 어리석음에 의해 빛을 잃을 수 있지만, 그 악덕이 크게 두드러져야만 비로소 빛이 바래기 시작한다. 권력자의 횡포는 평범한 사람의 사소한 일탈보다 훨씬 쉽게 용인되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서 공격성을 솔직함이나 능력으로 포장하는 풍조는 이러한 묵인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이 같은 강자 숭배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역사가 보여준다. 20세기 초 파시즘 창궐기의 풍경이 지금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바로 그 시대의 문턱에서 소스타인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을 통해 이 현상의 구조를 분석하는 개념 틀을 제시했다. 그의 시각에서 힘의 논리를 앞세우는 지도자들의 기질은 고대 야만 시대의 약탈적 기질에 닿아 있다. 베블런에 따르면 이러한 호전적 기질을 습관적으로 지닌 집단은 세습적 유한계급과 하층 범법자뿐이며, 의견 차이를 힘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상류 신사와 거리의 건달이 공유하는 특성이다. 오늘날 ‘강하다’고 칭송받는 지배자들의 면면은 베블런이 그려낸 이 전형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그럼에도 대중이 이들에게 매료되는 것은 자신도 강력한 포식자가 되고 싶다는 욕구 때문일지 모른다. 베블런은 나아가, 산업적으로 성숙한 국가들 사이에는 서로 적대해야 할 물질적 이유가 더 이상 없으며, 충돌이 지속되는 것은 유한계급의 약탈적 성향이 전쟁의 전통을 유지시키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스미스가 말한 ‘동감’이 사라지고 약탈적 승리만이 찬양받는 사회는 결국 내부의 파괴와 외부의 전쟁으로 치달을 위험이 높다.
 
그러나 스미스가 강조한 진정한 강자의 덕목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모습과 거리가 멀다. 스미스에게 진정한 강자란 격정과 이기심을 억누르는 ‘자기통제’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이때 자기통제는 자신의 행동을 내면의 불편부당한 관찰자에게 끊임없이 비추어 봄으로써 타인과의 감정적 조화를 가능케 하는 품격 있는 절제다. 스미스에게 인간 본성의 완성이란 타인을 위해 많이 느끼고 자신을 위해서는 적게 느끼되, 이기적 감정을 억제하고 자비로운 감정을 펼치되, 그 조화의 기준을 불편부당한 관찰자의 판단에 두는 데 있다. 반면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내고 타인을 짓밟으며 허영심을 채우는 이들의 거친 행동은 강함의 증거가 아니라, 내면의 재판관을 외면한 채 드러나는 야만적 기질의 노출일 뿐이다.
 
이를 바로잡으려면 스미스가 제시한 두 가지 덕의 조화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위엄과 절제에서 비롯되는 ‘의연한 덕’과 타인에의 배려에 기초한 ‘온화한 덕’이 함께할 때 인간은 비로소 온전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 베블런의 통찰을 더하면, 진정한 강자는 타인 위에 군림하는 약탈적 착취자가 아니라 공동체에 실질적 도움을 주는 ‘장인 본능(instinct of workmanship)’에 충실한 사람이다. 내면의 절제라는 개인의 도덕적 각성과 생산적 기여라는 제도·문화의 개혁이 함께 이루어질 때, 야만에 맞서는 온전한 응답이 가능해진다.
 
가짜 강함의 가면을 벗기는 일은 우리 시대 언론의 시급한 사명이기도 하다. 대중의 도덕적 감정이 마비되었을 때, 언론은 개인 내면의 ‘불편부당한 관찰자’가 수행하는 역할을 사회적 차원에서 떠맡아야 한다. 권력자의 성공 신화를 중계하거나 거친 언행을 가십으로 소비하게 하는 대신, 그 이면에 감추어진 악덕과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오만과 폭력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아픔과 분노에 귀 기울여야 한다. 결국 문명사회를 지탱하는 힘은 약탈자의 흉포한 고함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이들의 낮은 목소리에서 나온다. 그 목소리가 모여 야만적 강함의 허상을 걷어내고 강인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품격으로 빈자리를 채워갈 때, 우리는 야만의 계절을 지나 인간의 시대로 조금씩 다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박종현 경상국립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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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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