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기성기자] 상전벽해(桑田碧海)다. 한때 폐족(廢族)을 자처했던 친노(親盧·친노무현) 진영이 총·대선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한명숙 전 총리는 15일 열린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에 올랐다. 문성근 국민의 명령 대표도 2위로 지도부에 입성하며 화려하게 정계 진출 신고식을 마쳤다. 이들은 박영선, 박지원, 이인영, 김부겸 신임 최고위원들과 함께 지도부를 구성,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을 진두지휘하며 야권 승리의 일선에 선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야권통합을 일단락 짓고 부산에서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 친노의 성지인 김해(김경수)로부터 시작해 양산(송인배)을 거쳐 북·강서(문성근), 사상(문재인), 사하(조경태·최인호)로 이어지는 이른바 낙동강 벨트의 안착 여부가 관건이다.
문 이사장과 함께 부산·경남(PK)을 대표하는 주자로 자리매김한 김두관 지사도 대선 전면에 등장할 것이 확실시된다. 영남주자론은 대선 구도를 기존 지역대결에서 벗게 할 유일한 타개책이란 게 야권의 일치된 목소리다.
뒤에는 전략가 이해찬 전 총리가 버티고 섰다. 여론마저 친노 진영에게 화해의 손짓을 내밀고 있다. 거칠 것 없는 친노의 귀환인 셈이다.
◇노무현의 죽음..그리고 6.2 지방선거
부활의 계기는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였다. 전대미문의 전직 대통령 투신 소식에 대한민국 전체가 충격에 빠졌다. 전국 각지의 분향소는 밀려드는 추모객들 발길로 들끓었다. 공식 추모객 500만명이 흘렸던 눈물은 슬픔이 됐고,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반(反)이명박 전선의 태동을 알리는 전주곡이자 재야로 흩어졌던 친노 진영의 결집을 이끄는 촉매제였다.
이듬해 6.2 지방선거는 친노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차세대 친노 3인방 김두관·안희정·이광재는 각각 경남과 충남, 강원을 석권했다. 좌(左)희정·우(右)광재의 당선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지역주의의 공고한 벽을 허물고 등장한 김두관 경남지사였다. 당선 직후 그는 “지역패권주의라는 벽에 자그마한 파열구 하나를 냈다”고 했지만 이후 중앙정치는 그를 ‘대안’으로 바라보게 됐다.
모든 밑그림은 이해찬 전 총리와 정세균 당시 민주당 대표의 합작품이었다. 관리형 대표였던 정 대표는 자신을 뒷받침할 절대 우군이 필요했고, 이 전 총리는 친노의 일선 복귀가 중요했다. 두 사람의 이해가 전적으로 맞아떨어져 한명숙 서울시장-유시민 경기지사-송영길 인천시장-김정길 부산시장-김두관 경남지사-안희정 충남지사-이시종 충북지사-이광재 강원지사로 이어지는 전국 도로망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한명숙은 강남의 저항에, 유시민은 민주당의 거부감에, 김정길은 지역주의에 각각 무릎을 꿇었지만 그간 한나라당이 독점했던 지방권력의 전면교체는 2012년 총·대선을 위한 거점 확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친노, 제1야당 민주당을 집어삼키다
지방권력 교체로 교두보를 마련한 친노는 권력의 정점인 총선과 대선을 향한 진격을 시작됐다. 곧 ‘혁신과통합’(이하 혁통)이 출범했다. 박원순 현 서울시장을 위시한 시민사회 세력이 참여했다. 혁통을 이루는 본질적 뿌리는 친노였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선두에 섰다. 경기지사 선거에 4.27 김해 보선까지 연거푸 패배한 유시민 통합진보당 대표를 대신해 친노의 대표주자로 정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이른바 ‘대망론’이었다. 친노와 진보매체의 전폭적 지원에, 노무현과 그를 동일시한 여론까지 더해지면서 문 이사장은 단숨에 손학규 민주당 대표를 제치고 야권 유력 대선주자로 자리매김했다.
민주당을 향한 압박 또한 본격화됐다. 명분은 ‘통합’이었고 여론은 ‘동력’이 됐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은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 자리를 혁통의 박원순 후보에게 내줬다. 제도권의 제1야당이 의석 하나 없는 외곽세력에게 처참히 패한 셈이다. 민주당은 자위하며 충격을 최소화하려 했지만 안철수마저 등장하며 당을 초토화시켰다. 특히 안 교수를 중심으로 한 제3신당설은 “통합이 아니면 죽음”이라는 이분법적 선택에 매달리게 했다. 한 수도권 의원은 “사실상 친노가 당을 접수했다”고 말했고, 또 다른 호남권 중진의원은 “외통수에 걸렸다”고까지 표현했다.
당내에선 손 대표가 통합의 선봉에 서며 악역을 자임했다. 박지원 의원을 중심으로 한 호남권의 저항을 “구태정치”이자 “기득권의 저항”으로 치부했다. “친노는 복당의 대상이지, 통합의 대상이 아니다”는 저항의 명분은 시간이 갈수록 급격히 세(勢)를 잃었다. 내년 총선 공천에 눈치를 보던 현역의원과 원외 지역위원장들도 대세로 선회했다. 박 의원이 “손 대표에 대한 대선 지지를 철회한다”며 ‘정치적 결별’을 선언하는 등 완강히 버텼지만 정해진 흐름을 되돌리진 못했다.
손 대표가 자신을 지탱해줬던 호남을 버리고 혁통과 손을 잡은 데는 대권에 대한 손익계산 때문이었다는 게 당내 중론이다. 야권통합을 통한 한나라당과의 1대1 구도는 정권교체를 위한 필수 전제조건이었다. 친노가 틀어쥔 영남의 지원은 통합의 최대 과실이었다. 4.27 분당 승리를 통해 증명된 수도권 영향력을 뒷받침할 최대 우군으로 친노의 영남 영향력을 꼽은 것이다. 한 측근은 “호남은 (대선) 후보가 정해지면 자연스레 뒤따라오는 집토끼”라며 “통합을 위해선 이들의 기득권 해체는 필수”라고 설명했다.
◇민주통합당 첫 수장에 친노 大母 한명숙
진통 끝에 민주당은 혁통이 주체가 된 시민통합당과 지난해 12월 합당을 공식 결의했다. 당명은 민주통합당으로, 약칭은 민주당으로 결정됐다. 새 지도부는 1.15 전당대회를 통해 선출키로 했다. 모든 초점은 자연스레 전당대회로 맞춰졌다.
당초 자천타천 당권주자만 20여명에 이르렀지만 한 전 총리를 1강으로 꼽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유력주자였던 박지원 의원은 통합 과정에서 점철된 내홍의 책임 탓에 ‘구태 정치인’으로 낙인 찍혀 당권 쟁취는 어려워졌다.
한 전 총리 측은 그간 “어떤 (전당대회) 룰이든 상관없다. 결심은 섰다”며 자신감을 한껏 드러냈다. 시민통합당을 이루는 근간인 친노의 정신적 대모(大母) 로 불리는 데다 시민사회, 노동계 등 통합에 참여하는 제 세력에게 거부감이 가장 덜한 인사로 평가된다. 또한 민주당 내 최대 계파 중 하나인 정세균계와 손학규계의 전폭적 지지를 이미 예약하기도 했다.
한 전 총리와 함께 문성근 ‘국민의명령’ 대표도 출격했다. 빅텐트, 이른바 야권 대통합을 주창하며 100만 민란을 통해 외곽에서 세를 규합했던 문 대표는 시민통합당에 몸담았던 대표적 친노 인사다. 그의 현장 연설은 대중의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는 15일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문재인 ‘총선 앞으로’..김두관 ‘숨겨진 대안’
친노에게 있어 지방권력에 제1야당 당권까지, 남은 건 대권 접수다. 이를 위해 친노의 거목이자 부산권 친노 인사들의 좌장인 문재인 이사장이 그간의 장고를 접고 총선 출마를 결단했다. 지역 또한 부산(사상)으로, 정면 승부수인 셈이다.
문제는 성적표다. 그의 당락을 비롯한 부산권 성적표가 어떻게 산출되느냐에 따라 대선주자로서의 그의 정치적 위상은 급격히 달라질 것이란 분석이다. 자칫 지난해 10.26 부산 동구청장 선거처럼 참패로 끝날 경우 대안은 급격히 김두관 경남지사에게로 옮겨 붙을 가능성이 크다.
김 지사는 1.15 전대에서 선출된 신임 지도부와의 협의를 거쳐 내달초 입당키로 했다. 마을이장에서부터 출발해 최연소 군수와 장관을 거쳐 지역패권주의에 균열을 냈다는 정치적 스토리가 무엇보다 큰 자산이다. 노 전 대통령의 외길(지역구도 타파)을 쫓아 이뤄낸 성과다. 또한 이 과정에서 보여준 철학과 가치, 정책은 “노무현을 넘어섰다”는 평가로까지 이어졌다. 김 지사 스스로도 차기 도전 의지를 굳힌 상황이어서 그는 이미 올해 대선을 좌우할 상수로 자리 잡았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문재인·김두관, 두 사람에 대한 기대는 노무현의 탄생을 만들었던 영남주자론에 근거한다. 정당·인물·지역·정책 등이 대선을 결정짓는 주요변수라는 점에서 인물 경쟁력과 함께 그간 대선판을 좌우했던 지역 구도를 예의주시해야 한다는 얘기다.
손 대표가 4.27 분당 승리를 통해 차기주자 자리를 확고히 했다지만 ‘보따리장수’란 노 전 대통령의 주술에서마저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한나라당 출신이란 태생적 한계는 그가 보여준 수도권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괴롭히는 트라우마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야권 지지층 결집력의 차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대목.
여기에다 수도권 민심이 이명박 정부로부터 돌아선 상황에서 전통적 지지 기반이었던 부산·경남의 흔들림마저 예사롭지 않고, 이를 가속화할 지역 대표성을 갖춘 주자가 나선다면 판세는 급속히 불리해질 수 있다는 게 한나라당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특히 지난 6.2 지방선거를 통해 민주당이 충청·강원 등 주요 광역시도에 거점을 마련했다는 점을 들어 파괴력은 박 전 대표를 대구·경북(TK)에 옭아맬 수 있다는 우려마저 제기됐다.
◇ 野 신임 지도부, 과제 만만치 않다
한나라당이 해묵은 병폐인 계파 대결을 멈추지 못하고 디도스 사태, 돈봉투 파문 등 갖은 악재에 시달리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한국정치를 지배하는 보수 진영의 큰 축으로 군림하고 있다. 또한 박근혜라는 확고한 대선주자를 갖고 있어 분당 등 심각한 분열로 이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비대위가 전열을 재정비하고 대폭 물갈이를 통해 참신한 인물들을 내세울 경우 반격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여기에 15일 선출된 민주통합당 신임 지도부의 과제가 있다.
특히 총선 공천 과정에서 계파 대결이 재연될 경우 통합의 효과는 국민적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또한 통합진보당과의 연대를 위해 어느 정도의 자기희생을 감수할 지도 관건이다. 자칫 기득권(호남)의 희생만 강요할 경우 오히려 전통 지지 세력의 분열을 낳을 수도 있다. 여기에 신임 지도부의 딜레마가 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은 그야말로 대혼전이라 일종의 사전 교통정리가 필요한 것 아니냐는 견해도 고개를 들고 있다. 이와 함께 PK 성적을 어떻게 거두느냐에 따라 총선 전체 성적표는 물론 대선 구도 전체가 근본적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커 현재의 여론(MB 심판론)에만 기대 낙관적으로 일관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우려 또한 크다.
새로 선출된 민주통합당 신임 지도부 양 어깨에 야권의 명운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