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기성기자] 경제민주화를 놓고 정치권과의 일대 혈전을 예고했던 재계가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여야를 동시에 상대하기에 버거울뿐더러 여론조차 우호적이지 않다는 게 최대 고민이다.
이는 결집력의 약화로 이어졌다. 경제민주화 법안 하나하나에 촉각을 기울이며 손익계산에 분주한 모습이지만, 한데 목소리를 결집시켜 전선을 형성하려 들지는 않고 있다.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13일 있었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줬다는 평가다. 앞서 이날 새누리당 경제민주화실천모임이 입법 예고한 금산분리 강화에 대해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한 데다, 지난 5월 이후 4개월 만의 소집이어서 회의장은 시작 전부터 긴장감이 감돌았다.
몰려든 취재진들 사이로 ‘작심’ 발언이 있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던 이유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자 ‘원론적’ 얘기 외에 이렇다 할 입장 표명은 없었다. 삼성·현대차·SK·LG 등 힘을 실을만한 그룹사들이 전원 불참한 탓에 회장단 회의 치고는 초라하기까지 했다.
발표문에 실린 경제민주화에 대한 내용은 “정치권의 경제민주화 논의에 대해 기본정신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다만) 방법에 있어 경제 성장 활력을 회복시키는데 초점이 맞춰지길 희망한다”가 전부였다. ‘우려스럽다’는 흔한 단어조차 나오지 않았다.
지배구조 개선 등 재벌개혁으로 이동된 논의의 초점이 잘못됐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지적한 데 그친 것이다. 또 성장 기조 유지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해 분배, 복지 등의 담론이 확대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에둘러 표현했다는 자위로 받아들여졌다.
회의에 배석했던 이승철 전경련 전무는 경제민주화 관련해 회장단의 직접적인 언급이 없었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다른 안건들이 많아 구체적 사안을 논의하기엔 시간이 모자랐다”고 말했다. “오랜 공백 뒤에 열리는 회장단 회의라 직접 언급하기 부담스러웠을 수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이 전무는 또 금산분리 관련해 언급이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아직 회장단이 신문을 못 봤는지 미처 내용을 숙지하지 못한 것 같다”며 대신 “헌법에 나온 경제민주화는 안정적인 성장과 적정 분배, 지배력 남용 방지,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강조하고 있고, 우리는 이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비록 브리핑 말미에 새누리당의 정책 방향과 관련해 “윈윈(Win-Win)이 아닌 루즈루즈(Lose-Lose) 정책”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지만, 개인 의견을 전제로 한 데다 회장단 공식 입장이 아닌 탓에 무게감이 크지는 않았다.
재계에서는 이를 두고 일차적으로 전경련의 리더십 한계를 지적하는 분위기다.
주요 그룹사의 한 관계자는 14일 “회장단 회의에 10명 이상의 총수가 모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며 “회원사들을 강하게 끌고 갈 수 있는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많다”고 말했다. 직접적으로 거명하진 않았지만 허창수 전경련 회장을 겨냥한 지적이었다.
또 다른 그룹사 관계자는 “성장과 분배라는 이분법적 틀에 갇힌 데다 투자와 일자리 위축 등 같은 얘기만 반복적으로 늘어놓는데 여론이 설득되겠느냐”며 반박 논거의 부족함을 질타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대응을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반론도 제기됐다. 주요그룹들이 정작 정치권과 여론에 맞서려는 부담은 피한 채 전경련 등 주요 경제단체에만 모든 것을 미뤄놓는다는 반박이었다. 한 관계자는 “삼성과 현대차 등이 회의조차 들어오지 않는 상황에선 누가 회장직을 맡더라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정치권과 여론 눈치에, 내부 이견까지. 재계가 정치권의 경제민주화 칼에 맞서기에는 방패를 들 힘조차 부족해 보인다. 대선을 앞두고 한층 압박수위를 높여나갈 정치권의 재벌개혁이 현재로선 재계와의 별다른 충돌 없이 무난한 과정을 밟아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