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연출가 박근형이 청소년극을 만든다는 소식에 적지 않게 놀랐다. 대학로의 대표적인 흥행 연출가가 청소년극에 손을 댄다는 게 이례적인 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박근형과 함께 작업한 배우들 중에는 박해일, 윤제문, 고수희 등 현재 스타로 발돋움한 이들이 많다. 배우들에게 선호도가 높은 것은 물론이고, 그동안 전문가들로부터도 두루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지난 수년간 연극계 차세대 리더의 상위권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게다가 박근형의 작품세계는 청소년극의 범주로 묶이기에는 다소 표현수위가 세다. <너무 놀라지 마라>, <경숙이, 경숙아버지> 등에서 그가 그려낸 가족상은 너무 비참해서 차마 마주하기에 당황스럽고, 결국 쓴 웃음을 짓게 한다.
작가와 연출을 겸하며 흥행성과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는 보기 드문 이 연출가가 과연 어떤 작품을 내놓을 지 궁금해졌다.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와 함께 만드는 이번 연극의 제목은 <빨간 버스>이고, 11월 22일부터 12월 16일까지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공연된다. 이번에도 블랙유머 가득한 작품으로 관객의 마음을 쑤셔놓을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 청소년극인데 박근형이라는 이름이 있어 신기했다. 어떻게 연출을 맡게 됐나?
국립극단에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가 있다. 청소년극을 연출하거나 써본 적은 없는데 예전에 썼던 <청춘예찬> 때문에 제안을 받게 됐다. 꼭 청소년에 국한되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주인공이 청소년이었으니까. 그래서 경험은 없는데 맡게 됐다. 사실은 나 스스로도 청소년극에 대한 선입견이 들긴 한다. 사실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갖고 깊이 있게 봐온 적이 없어서 잘 모른다. 그런데 어른들의 문제가 청소년의 문제고, 청소년의 문제가 이 사회의 문제고 다 두루두루 얽혀 있다는 생각은 한다. 청소년극이라는 것을 떠나서 중심인물들이 청소년이고, 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고민이라든가 이런 문제를 얘기해보려고 하게 됐다.
- 스태프 명단에 예술교육팀이 있던데 공연에서 어떤 역할?
(동석한 국립극단 김미선 프로듀서의 설명)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만큼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소통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을 연결해 주는 작업들을 한다. '빨간버스 승객단'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청소년 관객들과 지난주에 처음으로 한 번 모였다. 연극놀이도 하고, 연출이나 배우들과 만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도 마련돼 있다. 학교를 다니면서 작품에 대한 설문작업도 진행했다. <빨간버스>의 중심 스토리에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일종의 인터랙티브한 작업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 대본을 쓸 때 배우 개인 캐릭터를 많이 반영한다고 들었다. 예술교육팀이 수집한 자료들도 많이 반영되는지?
예술교육팀에서 소스를 많이 준다. 어른들이 보는 청소년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들이 느끼는 고통이나 고민에 대한 것들이다. 그래서 연습하고 대본 쓰면서 참고하기도 한다. 그 아이들만이 쓰는 말투가 있는데 그런 것들에 대해서 조언을 받기도 한다.
- <청춘예찬> 했던 게 벌써 13년 전이다. 그동안 청소년들의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나?
달라졌다기보다 더 열악해졌다고 생각한다.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 옷 입는 것, 자율적인 학생조례 등 학생들에게 간섭을 안 하는 식으로 변하긴 했는데 근본적으로 그 아이들이 갖고 있는 문제는 <청춘예찬> 때나 내가 청소년이었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 아이들을 보이지 않게 옥죄는 게 더 많다는 생각이 든다.
대표적인 게 입시다. 어른들이 인정하는 괜찮은 학교를 가지 못하는 많은 인원들이 80% 이상이라고 보는데 이 사람들은 말은 안하지만 매일 열등감 속에 살고 있다. 그 중에 극소수가 부모님이나 사회에서 원하는 학교에 가고, 그 다음에 또 똑같아진다. 결국 청년 백수가 되고. 신문이나 뉴스에서 경제지표를 이야기할 때 취업률이나 실업률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건 이미 청소년 때부터 시작이 되는 것 같다. 그 연장선 상에 사람들이 먹고 사는 이야기까지 다 연결돼 있다. 이중에서 제일 중요한 게 낙오자 같은 마음으로 산다는 것. 그래서 아이들이 예전의 아이들보다 더 옥죄는 마음으로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주인공인 세진이 같은 경우 모범생으로 표현된다. 공부도 잘 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전임신과 출산이라는 일탈을 한다. 세진은 문제의식이 있는, 앞선 사고방식을 지닌 아이로 그려지나?
그런 건 아니다. 그 아이의 행동이나 생각이 어찌됐건 주체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거다. 아기는 세진이가 낳은 아기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갖고 있는 꿈이기도 하고 좌절이기도 하다. 아무도 건들 수 없는, 청소년들만이 간직하고 있는 아픔 혹은 희망 같은 거다. 그런데 이것은 어른들은 절대로 모르는, 말로도 설명이 안 되는 어떤 것이다. 결국 그 아이가 짊어지고 가야하는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들이 출산의 방식으로 밖으로 오픈된 것이다. 단지 어느 날 세진이 아기를 먹여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분유를 훔치다가 사람들에게 아기가 있다는 것이 알려졌을 뿐이다.
- 그 동안의 작품을 보면 항상 아버지는 출타 중이고, 어머니는 상황을 견디기만 한다(웃음). 가족의 힘, 위로하는 힘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나?
그렇지 않다(웃음). 우리나라가 가부장적 사회이고 아직도 유교사회다. 아버지라고 상징되는 어떤 인물이 견고한 상태다. 아버지는 그냥 뚜벅뚜벅 걸어가는 정직한 존재여야 하는데. 조금 거창하게 얘기하면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흘러오면서 아직까지도 계속 그렇게 굴절되어 있는 것 같다. 큰 덩어리로 보자면 아버지가 아버지 몫을 못하는 거다. 그런 것을 은근히 빗대려고 연극에서 왜곡되고 파탄난 상태로 표현하는 거다.
- 이번 연극 <빨간 버스>에 대해 소개하는 글을 보면 '사회로 질주하는 버스가 있고, 여고생들은 거기에 탄 존재'라는 설명이 나온다. 이 연극은 그들에게 건네는 위로라고 하는데 사실 굉장히 씁쓸한 위로다.
어떤 형태로든 아이는 어른이 된다. 청소년도 어른이 되고. 위로라기보다는... 이 진구렁텅이 같은 곳에서 그들은 마음 한 군데에 열등의식을 가지고 살고 아마 좌절할 것이다. 사회는 냉정하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서 견뎌야 된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자라서 아버지, 어머니 세대가 됐을 때 그들이 자란 풍토가 아닌, 다른 풍토를 만들어줘야 한다. 잠깐 그러다가 다시 아주 많이 뒤로 후퇴했는데... 나는 그럴 날이 오리라고 본다.
그리고 청소년들도 힘들겠지만 스스로 자유로워져야 한다. 사실 학교 안 다니면 어떠냐. 학교 다녀봤자 웬만큼 해서는 목표대로 되지도 않는다. 미꾸라지 같은 애들은 공부를 잘 하는 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줄을 잘 서고 어떻게 빠져 나가 승승장구한다. 허점을 통해 성공하고, 그래서 어른이 된다. 그런데 대부분은 그 빈 구멍을 못 찾는다. 그 빈 구멍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보이지 않는 백그라운드가 있어야 하니까. 그래도 대부분은 힘들게 사니까 다행인 거다. 힘들지만 그게 나중에 자산이 될 거다.
- 배우 캐스팅 과정이 궁금하다.
예술감독님, 극장 관계자분들과 함께 오디션 봐서 뽑았다. 이 작품과 어울릴 것 같은 몇몇 배우들에게 오디션을 보라고 하긴 했는데 그 중에 오디션을 통과한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
- 연습과정에서 배우들로부터 발견한 지점이 있는지? 작품에 반영할 부분이 있었나?
배우들이 좋다. 몇몇 분 빼놓고는 일단 외모가 동안인 사람들을 뽑았는데 배우들이 능동적으로 본인들이 청소년일 때의 이야기들을 많이 했다. 어떤 부분에서는 원래 생각했던 것에다 그 배우의 이미지를 조금 넣기도 하면서 재밌게 가고 있다. 배우들이 이제 막 찾아가는 과정이다.
- 이번 공연을 하는 소극장 판은 쉽지만은 않은 무대다. 재밌는 공간이긴 한데 울림이 있는 무대고 공간이 아주 크지는 않다. 공간 활용은 어떻게 할 계획인지?
거기 공연장이 사실 어렵다. 특히 배우들은 객석이 넓은 원형무대를 힘들어 하지 않나. 그런데 다행히 리허설 시간이 많다. 무대를 일주일 정도 사용하니까 적응하면 될 것 같다. 무대 사면을 다 객석으로 사용할 지 아니면 삼면만 사용할 지는 아직 결정 안 했다. 무대감독과 무대 디자이너랑 상의해서 결정할 예정이다. 그런데 어떤 무대이건 힘들다 치면 다 힘든데, 재밌다 치면 다 재밌다. 큰 걱정은 안한다.
- <빨간 버스>라는 제목을 관객이 시각적으로 인식할 만한 장치가 무대에 있나? 아마도 없을 것 같긴 하다.
없다. 아직 확정은 안됐는데 무대 위에 횡단보도를 그려놓을까 한다. 신호등을 세우고. 보통 신호등은 '이쪽이 빨간 불이면 저쪽은 파란 불' 하는 식으로 체계가 있다. 그런데 극이 흘러갈수록 신호등들이 서로 같은 빨간불이 되기도 하고 파란불이 되기도 하는 식의 무대를 생각하고 있는데... 뚜껑을 열어봐야 한다(웃음).
- 합창이 나온다고 들었다. 왠지 아름다운 하모니가 나올 것 같지는 않은데(웃음).
합창단 중 세 명의 여학생이 친하다는 설정이다. 그 아이들이 노래를 세 곡 부른다. 노래를 잘 부르거나 잘 하는 연주가 들어가거나 그렇지 않고 그냥 실력껏 열심히 부른다(웃음).
- 합창의 의미가 있나? 왜 합창단원을 등장인물로 내세우게 됐나?
의미까지는 생각을 안 했다. 내 딸이 합창부에 있다. 그런데 옆에서 보니 합창부 생활이 재미있더라. 공식적인 행사로 놀러다니는 게 많다. 다른 서클은 어떨지 몰라도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것 같다. 다른 학교 행사도 있고, 자기들끼리 인사동에 노래를 부르러 가기도 하면서 알아서 놀더라. 노래 부르러 다니는 것에 대해 선생님이 크게 나무라지도 않는 것 같다. 조금 널럴한 환경에서 즐기면서 노는 아이들이 이 극에 등장한다.
- 주인공인 세진이에게 아이가 절대적인 존재라고 했다. 그런데 세진이는 왜 사랑에 기대지 않고 아이 아버지가 누군지 세상에 말도 안 한 채 마음을 닫아 버릴까?
닫은 건 아니다. 사랑의 결과로 아이가 생겼지만 자기 의지를 반영하는 것뿐이다. 물론 지울 수도 있겠다. 어제 들은 얘긴데 고등학생 사이에 낙태계가 있다더라. 돈을 모아서 낙태 비용을 서로 대는 것이다. 나 어릴 때를 생각해보면 실제로 고등학생 때 아이 낳고서 키우려고 그만두는 애들 있었다. 아마 지금도 있을 것이다.
세진의 경우 어쨌든 그 아이를 사랑한다. 사랑하기도 하면서 짐이자 굴레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걸 다른 사람들한테 오픈하지 않고 스스로 키우려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여자아이가 아이를 낳아?'라는 도덕의 차원을 넘어서서 저렇게 살아도 괜찮은 것 아닌가? 어떤 판단이든 판단을 스스로 내리고 판단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나는 나쁘다고 보지 않는다. 이 공연에서 아이가 그런 아이가 됐으면 좋겠다. 그런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아이의 의미가 다중적이면 더 좋다.
- 이번에도 공연이 빠른 호흡으로 진행되나?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 경쾌하고 즐겁게 가야 하는데 현재까지는 썩 잘 진행되지는 않고 있다(웃음).
- 관객이 어떤 태도로 공연을 봐줬으면 하는지?
목표는 언제나 하나다. 관객이 졸지 않는 것. '좋았다, 나빴다'는 나중 문제다. 끝날 때까지 집중해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저마다 본인들의 견해가 있을 거다. 견해는 제각기 다르겠지만 공연이 끝날 때까지는 관객이 이성적인 자세로 멀리서 보기 보다는 연극 속에 들어와서 그 마음으로 봐주길 바란다. 그리고 무대에서 펼쳐지는 게 '노란 고등학교'의 이상한 아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관계된 내 아이들, 내 조카, 이웃들의 이야기로 봤으면 한다.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