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예뻐? 얼마나? 누구보다 예쁘다는 거야?"
질투에 사로잡힌 듯한 저 목소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천하의 절색이었다는 수로부인의 것이다. 삼국유사 속 수로부인 설화를 소재로 삼은 연극 <꽃이다>는 수로의 미모와 모험담에 의구심을 제기하며 그녀를 둘러싼 신화를 교묘히 비튼다. 상류계층의 신화에 균열을 냄으로써 이 극의 장르가 명확해진다. <꽃이다>는 수로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권력과 민심의 속성을 파헤치는 정치극이다.
이야기는 수로부인의 남편 순정공이 강릉으로 부임하는 길 위에서 시작된다. 강릉은 순정공의 주요임무이자 나라의 숙원사업인 성벽공사가 진행 중인 곳이다. 순정공의 행차는 공사에 동원된 2천 장정을 돌려달라며 길 위에 누운 마을 무당 검네와 마을 여자들에 의해 가로막힌다.
수로부인은 설화 속에서처럼 여러 겹의 꽃잎으로 둘러싸인 꽃, 혹은 나비를 꾀어내는 꽃과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나 설화 속 인물보다는 훨씬 더 적극적이다. 수로는 빼어난 미모를 적극 이용해 이 세상을 쥐락펴락하려 한다. 그녀 주변에는 진골 남편인 순정공과 화랑인 득오, 호일랑 등 수많은 남자들이 맴돈다.
수로부인에 새로운 캐릭터를 부여한 것처럼 수로부인 설화도 기존의 내용에서 교묘하게 비틀어진 채 등장한다.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이 위험을 무릎쓰고 절벽 아래 핀 꽃을 꺾어 바쳤다는 '헌화가'의 내용은 이 극에서도 중요 모티프 중 하나로 활용된다. 그러나 헌화가와는 달리 극 중 노인은 수로의 미모에 반한 수동적인 인물이 아니라, 정적들을 피해 행적을 감춘 수로부인의 아버지이자 수로에게 무엇이 진정한 아름다움인가에 대한 깨달음을 주는 신묘한 인물로 등장한다.
수로의 용모가 뛰어나 깊은 산이나 못을 지날 때 번번이 신물들에게 붙들렸다는 설화도 살짝 변형돼 극에 활용된다. 무당 검네는 순정공 일행과의 담판에 실패하자 성벽공사에 동원된 장정들을 마을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용신에게 제사를 지내겠다며 처녀 아리를 제물로 삼겠다고 선포한다. 이 과정에서 수로는 아리의 미모에 대해 겉잡을 수 없는 질투에 사로잡히고 천하제일의 미색인 자신이 대신 제물이 되겠다고 자청한다. 수로의 신화적 이미지가 가장 무참히 깨지는 대목이다.
설화가 뒤틀린 자리에는 권력을 탐하는 자들의 거짓 신화가 속속 들어선다. 모두들 한 목소리로 그녀를 추종하고 칭송하지만 속내에 감춰둔 진짜 목적은 따로 있다. 미인 수로를 내세워 백성을 미혹하고, 정치적 용도로 활용하려는 것이다. 화랑 득오는 어수선한 틈을 타 수로를 건져내고 거래를 제안한다. 수로는 바다 속 용신을 만나는 대신 지상의 잠룡들과의 한바탕 질펀한 놀음에 동참한다.
<꽃이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오늘날 우리사회 각계각층의 모습과 시시각각 겹친다. 현재의 권력뿐만 아니라 미래의 권력까지 염두에 두고 관계를 맺어나가는 수로부인, 저 멀리 당나라의 침입만 두려워하고 백성들의 마음은 살피지 못하는 권력자들, 무능력한 데다 타락하기까지 한 화랑, 번드르르한 말에 매번 속는 백성 등 다양하고 설득력 있는 캐릭터들은 이 극에 풍자의 밀도를 더한다.
그러나 공연은 노골적인 비판으로 일관하는 대신 무대와 음악의 힘을 빌어 관객을 사유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방법을 택했다. 무대 사면을 둘러싼 물길은 용신 제사 장면에 설득력을 더하는 동시에 무대전체에 투명한 프레임을 두른 듯한 효과를 낸다. 동심원이 새겨진, 무대 뒤편 구리재질의 거대한 판에는 수시로 배우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려 물 이미지를 연장한다. 이로써 관객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비춰본다는 느낌을 받는다. 또 북과 종을 활용한 라이브 음악은 몽환적이지만 어딘가 기괴한 느낌이 있어 극과 관객 사이에 객관적 거리감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작 홍원기, 연출 박정희, 출연 정재진, 이용이, 서영화, 이승훈, 김정호, 유병훈, 호산, 이서림, 임성미, 강동수, 김준원, 최재형, 한상민, 김경회, 박미영, 신문영, 황정화, 10월7일까지(월요일, 추석당일 쉼)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